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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02. 2016

Effect du matin(아침의 인상) 1855

무엇에 쓰일 것인가?

Les Boeufs allant au labour ; effect du matin, 1855. Oil oncanvas, 260cmⅹ400cm

장자 오르세를 걷다. 열 번째 이야기


Constant Troyon (콩스탕 트루아용)이 묘사한

Les Boeufs allant au labour ; effect du matin

(쟁기를 메고 가는 황소 ; 아침의 인상) 1855


바르비종파 동물 화가들 중 동물 묘사가 가장 뛰어난 Constant Troyon(콩스탕 트루아용 1810~1865)은 1810년, 국립 자기 제작소가 있었던 파리 근교 셸부르에서 출생하였다. 1833년 살롱에서 데뷔하여 1847년의 네덜란드 여행에서 Paulus Potter(파울러스 포테르)에게 영감을 받는다. 포테르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동물화가로서 목초지에서 노는 가축들의 생태를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특히 포테르는 색채의 조화에 뛰어나 외광(Plain Air)의 효과를 살리는 것에 재능을 보여, 그의 작품 대부분은 밝고 환한 풍경 속에 있는 동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바르비종 파의 이상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으로서 트루아용의 이 그림에서도 동트는 아침 햇살에 반사된 소들의 입김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855년에 그려진 낭만적이며 동시에 사실적인 이 그림은, 낭만파 회화의 종착역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바르비종 파(École de Barbizon)의 후반부쯤에 위치하는 그림이다. Jean-Baptiste Camille Corot(코로), Charles-François Daubigny(도비니), Jean-François Millet(밀레), Théodore Rousseau(루소)로 대표되는 바르비종 파들은 바르비종이라는 작은 마을이 속한 퐁텐블로 숲 주위의 소박한 농촌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묘사를 그들 회화의 주제와 철학으로 삼았다. 


이 바르비종파들은 뒤 이어 이어지는 르누아르와 모네로 대표되는 인상파 회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그러한 인물들 중에 트루아용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화면 중앙을 지평선이 가르고 있다. 사실 이러한 화면의 이분법 구도는 약간은 위험하기까지 할 정도로 과감한 것이지만 바르비종 파들의 그림(밀레, 도비니)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기법이다. 퐁텐블로 주위의 풍광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옮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높이에서 관찰되는 그대로의 지평선을 그림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 떼들이 내뿜는 하얀 입김이 아침 햇살에 선명하지만 역광인 탓에 목동이나 소들의 표정까지는 읽을 수는 없다. 이러한 표현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정치, 경제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당시는 민중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현실이었고, 이런 이유로 미루어 볼 때 트루아용의 역광 묘사는 민중의 고통 어린 표정으로부터 짐짓 자유로워지고자 하는(아침 햇살을 도구로 삼아) 작가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가로 세로 2.6mⅩ가로 4m 나 되는 이 거대한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이 그림의 제목처럼 트루아용이 표현하고자 했던 ‘아침의 인상’이 너무나 확연하게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장자 이야기

무엇에 쓰일 것인가?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이다.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가 묵고 있는 집 문 앞에서 서성이며 노래를 불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그대의 덕이 쇠했는가. 

미래는 기약할 수 없고, 지난날은  다시 잡을 수 없는 것.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루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지금 세상에선 생을 보전하기만 해도 다행. 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 잡는 사람이 드물고 화는 땅보다 무거운데 피하는 사람이 없구나. 

아서라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위태롭고 위태롭다. 땅에 금 긋고 그 길로만 가는 것은. 가시나무여, 가시나무여 내 갈 길 막지 마라. 물러서고 돌아가려니 내 발을 상하게 하지 마라. 


<장자><인간세>의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광인 접여의 노래는 <논어> 미자 편에 처음 나온다. 미자 편에 이르기를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한 때 초나라에 머물렀는데 접여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면서 봉황아 어찌 덕이 이토록 쇠했느냐 지나간 행위는 만회할 수 없고 미래의 일은 구할 수 없으리라. 그만두어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라고 노래를 불렀다. 공자가 쫓아가서 그 노래한 사람과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그 사람은 급히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공자는 마침내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공자를 따르는 유학에서는 천하에 도가 있을 때는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은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접여는 성군이 없던 시대에 애써 쓰임을 얻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공자의 덕이 쇠하였다고 풍자하고 있다. <장자>에서 이 이야기는 공자가 쓸모 있는 것의 쓸모(有用之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모른다는 우화로 인용한다.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 만물의 흐름을 한눈에 간파한 장자답게 쓸모없음의 편안함을 말하며 광인 접여를 통해 공자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접여는 공자를 봉황이라 칭한다. 봉황이었던 공자가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쓰임을 받기 위해 내세운 것은 과거와 미래이다. 공자는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여긴 주나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옛 성인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그것으로 규범(사서삼경)을 삼고자 하였다. 옛 것을 되새기는 과거 지향적 사유는 축적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 묶여있다. 쓰임을 받기 위한다는 것 자체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즉 공자는 과거와 미래를 통해 언제나 유용지용(有用之用)에 집중한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시공간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지나간 세월은 잡을 수 없는 것이고 다가올 미래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를 부둥켜 앉고 추종하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이기에 무위자연하고 소요유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은거하지 않고(현실을 완전히 도외시하지 않고) 현실에서 살아내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대해 장자는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벌써 쓸모 있다고 본다. 즉 쓸모가 있는지 혹은 없는지 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면서 세상을 주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문제 삼는다. 쓰는 자와 쓰이는 자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무엇이 쓸모 있는지 또는 무엇이 쓸모없는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오직 쓸모라는 기준으로 바라보면 자기 자신마저 그 쓸모라는 기준으로밖에 바라보지 못하고 이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쓸모에 맞추고자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장자의 소요유와 제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삶이란 말인가? 


우리는 평생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강요받았고 또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쓸모의 요구에 순응해왔다. 그런데 과연 이 쓸모의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누구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돌연 나의 삶이 무용해진다. 나는 평생 이 쓸모의 유령에 사로잡혀 쓸모 있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 온 것이란 말인가? 누가 나를 쓰는지도 모르면서!!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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