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근 화백을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를 떠올립니다. 엄경근의 어린 시절 삶과 세간티니의 어린 시절 삶이 크게 다르지 않고, 세간티니가 남겨 놓은 그림과 엄경근의 그림이 저의 관점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보입니다. 그 알 수 없는 애잔함과 쓸쓸함, 그러나 결코 그 슬픔에 빠지지 않는 묘한 긴장감 사이로 아주 희미한 희망과 동시에 따뜻함까지…… 하지만 나는 엄경근의 그림이 더 좋습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악마 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끝도 없는 탐욕으로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과일을 따먹기 위해 손을 내밀지만 닿지 않고, 물이 입에 닿으면서도 절대로 마실 수 없는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는 탄탈로스처럼 우리는 언제나 욕망에 굶주려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생지옥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합니다.(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8)
왜 그럴까요? 예술 작품에 몰입하면, 나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욕망이 줄어들고, 그 원인을 따지는 일 역시 잦아듭니다. 어떤 개념이나 목표 때문에 골몰하는 것이 줄어들어 머리가 잠시나마 쉴 수 있지요. 따라서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도 생각나지 않는,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무아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경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이런 입장은 예술의 무관심성, 무개념성, 무목적성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위대한 선배 철학자 칸트의 주장과 상통하는데, 분명 칸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엄경근 화백의 신작 그림 하나가 저에게 위 쇼펜하우어가 말한 경지 가까이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방 골목 시리즈 중 ‘진주문고’를 그린 그림인데 처음 페북에서 공개했을 때 약간의 충격이 있었고, 어제 그 실물을 보면서 무아지경 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오래 그림 속을 어슬렁거리며 행복했습니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에게 헌정된 이 그림은 ‘진주문고’를 그린 것입니다. 그림 속에 있는 진주문고는 책으로 된 세상입니다.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습관처럼 논리구조를 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보면서 왜 거기에 그것이 있고 그것은 무엇인가를 따집니다. 그런 논리구조를 버리고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림 맨 아래쪽에 진주문고 로고가 있고 그 앞에 화분이 놓여있습니다. 화분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환한 전등을 매달고 그림 속에서 대각선으로 그리고 수평으로 빛을 밝힙니다. 당연히 엄경근의 달은 먼 하늘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살갑게 떠 있습니다. 책을 뚫고 쌓고 펴고 다시 각을 세워 공간을 창조하고 그 공간 사이사이에 또 책과 사람을 배치하였는데 그림 속에서 책과 사람은 그리고 공간은 각각이었다가 어느 순간 내밀한 공간 속에서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엄경근은 그림 속에서 책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를 모두 표현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노력 덕분으로 그림 속을 어슬렁거리는 우리는 한편으로 정겹고 또 한편으로는 절묘한 책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진주문고에는 작은 전시공간이 있습니다. 1층 안쪽에 있는 이 공간에서 엄경근의 그림도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여태훈 대표의 누이의 그림입니다. 아트스페이스 진주라고 명명된 이 공간에서 ‘노랑 낙타’는 아주 오래 전시될 것 같습니다.
2층 여서재는 사람들이 앉아서 북 토크 중인 모양입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여서재의 북 토크가 끊임없이 이어지듯 그림 속 여서재도 불이 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태훈 대표가 창조한 여서재에서 놀랍게도 저 역시 북 토크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아마 누군가의 북 토크가 그림 속에서는 계속되고 있겠지요.
그리고 맨 위층에 보이는 선강루仙康樓!
이 집의 주인 여태훈 대표는 자신의 사적인 공간인 이곳에서, 진주와 하동 그리고 인근 각지의 수많은 재야의 시인묵객들에게 향기로운 차를 베풀고, 사람들은 그 차를 마시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언제나 이야기 소리가 두런거리지요. 지금 그림 속 실루엣으로 처리된 인물들 속에 저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이야기는 아주 오래 이어질 듯합니다.
그림 속 선강루 지붕은 수평이 아닙니다. 선강루 앞마당의 나무 두 그루만큼 높은 처마가 뒤로 갈수록 낮아지는 것은 화가의 천재성에서 비롯된 멋진 위트라고 생각됩니다. 17세기 영국의 풍자 시인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위트를 ‘발상의 예리함’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 작은 부분으로 해서 그림은 따뜻함과 예리함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속에서 하루 종일 어슬렁거릴 수 있도록 절묘하게 공간을 배치한 화가의 예술성에 다시 한번 감동하면서 이 그림의 대상인 진주문고를 운영하시는 여태훈 대표의 삶의 방향과 지향점을 이렇게 명징하게 드러낸 8호짜리 이 작은 그림에 존경과 사랑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