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發話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여는 순간 어긋나 버린다(틀린다)는 뜻. 말한 즉 곧 틀리다, 입만 벌리면 잘못 말하게 된다, 입을 벙긋하는 순간 어긋난다. 대체로 이런 뜻으로 무엇이든 말로 표현하려면, 곧 입을 여는 순간 참모습과는 달리 빗나간다는 말이다.
비록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어의 한계, 표현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로써 선禪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면, 그 순간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만 움직여도 곧 어긋난다는 말과 비슷하다. 세상 모든 일이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든 일에 조심을 해야 하고 더욱 말은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2. 基底
언어란 생각이나 느낌(마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음성·문자·몸짓 등의 수단 또는 그 사회 관습적 체계다. 이 정의대로라면 생각이나 느낌(마음)이 먼저 있고, 그다음이 언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의 바탕에 언어라는 체계가 없이 생각이 구성되기 어렵다는 것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또, 생각의 각 부분이 이미 언어적 방식을 통해 인식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위의 정의는 수정되어야 될 부분이 없지 않다.
단지 전달과 표현 수단으로써만 언어가 존재한다면 언어(영어 ‘language’의 어원은 13세기말에 나타난 langage, 즉 ‘말로 표현되는’의 의미를 담고 있다.)의 함의는 매우 축소될 가능성이 많다. 일정한 생각의 전달과 표현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언어라면 생각의 표현을 위해 언어의 습득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이 말만 좀 더 확대해보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말로 바뀔 수 있다. (전달과 표현 수단으로써만 언어가 존재한다면 분명 생각이 존재함에도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동일한 문화권에서 어린이의 생각은 성인에 비교할 수 조차 없게 된다. 이 상황을 다른 문화권으로 확장하면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문화권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면 그 문화권의 아이와 같거나 혹은 그 보다 못한 생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다소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체계로만 정의되는 언어는 일정하고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면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생각과의 先, 後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언어는 과연 사유 체계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사유 체계가 다시 논리적인 체계로 변화한 것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장자 제물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앞서 의문의 핵심과는 조금 떨어진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다.
有有也者 有無也者 有未始有無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고, (‘없음’이 있다.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없음’이라는 상황, 즉 비어있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없음’이 아직 형성되기 전도 있고, (그러니 그 상황 이전의 단계도 존재할 것이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전의 그 전도 있다. (역시 같은 이유로 그 이전의 상황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생각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특별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던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과 그 이전의 상황도 있다. 그러면 무엇이 생각을 일으키는가? 즉 생각의 동기는 무엇인가가 궁금해진다. 어떤 자극이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가?
이 부분은 아주 긴 이야기가 있다.(참조 https://brunch.co.kr/@brunchfzpe/1287)
3. 日常
국가를 경영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정책에 찬성하는 또는 반대하는 자들의 언어는 각각 다르다. 위의 이야기로 유추해보자면 언어 구사의 방식이 아니라 언어 체계가 다르고 그 체계를 구성하는 생각이 다르며 그 생각을 조합하여 일관된 구조를 만드는 방식도 다르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 속의 언어들을 들으며, 문득 그 언어들의 내면을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