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중학교 철학수업(70)

by 김준식

드디어 70시간에 도달했다. 아이들에게 고맙고 스스로에게도 고맙다. 여전히 아이들도 나도 혼란스럽고 어렵지만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중학교 철학은 이제 2쇄를 찍는다. 출간된 지 7개월이 지났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책 속에 그림 한 장 없고 내용조차 현실성이라고는 1도 없는 그런 책을 누가 사겠는가? "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지금 중학교 철학 2권을 준비 중이다. 약간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5.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둘 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이 지적인 문명의 발전이 앞선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1]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의미와 조금 다른 견해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두 개의 사건은 종교적 신학적 반항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부분이 사실은 정치적인 반항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선택적으로 종교개혁, 혹은 반종교개혁으로 명명된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은 교황이라는 권위에 대한 거부이자 동시에 저항이었다. 마찬가지로 반종교개혁은 르네상스로 축적된 이탈리아의 도덕적인 자유에 대한 반항으로 보기도 한다.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루터[2], 칼뱅[3]이 있고 반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은 로욜라[4]였다.



1) 루터의 영향


서양 철학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은 철학의 시계를 천년 전으로 되돌려 다시 성 아우구스티누스[5]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적 영광을 구현하는 몇 가지 기초로 전락한 철학적 논의가, 그나마 있었던 그동안의 진척을 접고 다시 과거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핵심이 바로 플라톤의 이원론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그의 신학적 열망의 중요한 도구였을 것인데 그의 저서 《고백록》[6]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신학)적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계승이었다. 플라톤 철학은 철저한 이원론에 기초한 철학이다. 즉 두 개의 세계, ‘이데아’와 ‘현실’을 구분하고 그것으로 모든 세계를 이해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이데아’를 ‘신’(창조주)으로 바꾸고 ‘현실’을 신에 의한 ‘피조물’로 대치시켰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으로 ‘영혼’과 ‘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을 강조하고 이원론적 논의의 밖에 있던 교회에 관한 부분을 강조하지 않았다. 루터의 이런 태도는 매우 의도적이었는데, 당시의 교회가 가졌던 권력을 약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사 교리(大赦 敎理)’[7]를 거부했는데, 대사가 남발되면서(면죄부) 이것을 대가로 교회가 거둬들인 돈이 교황청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것이 종교 개혁의 핵심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군주가 개신교도인 나라에서는 군주를 교회의 수장으로 분명하게 인정하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루터에게 교회는 ‘영혼’과 ‘신’의 문제 다음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입장(개신교의 입장)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의 헨리 8세는 루터의 이러한 입장을 이용하여 교황권에 눌린 왕권 강화를 기도하였고 그 결과 헨리 8세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는데 일단은 성공하게 된다. [8]이 사건을 계기로 인근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등의 군주들도 이러한 태도를 적극 수용하여 기존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개신교를 국교로 삼아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가지는 본질적인 부분 중 하나가 개인주의적 측면이었는데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큼이나 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국가가 종교 문제를 결정하는 문제를 두고 오랜 갈등의 과정[9]을 겪게 된다. 거의 100년에 걸친 지루하고 명분 없는 싸움의 끝에 사람들은 종교 간의 첨예한 반목에 염증을 느꼈고 마침내 종교적 관용의 기운들이 싹텄으며 변증법적인 결과에 따라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18세기 19세기 자유주의[10]의 바탕이 되었다.



2) 로욜라의 영향


로욜라는 군인(하급 귀족의 자제로 17세에 자원 입대함) 출신으로 그가 만든 예수회[11]는 군대식이었는데 총장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여야 하고 모두 이교도에 맞선 싸움에 참전할 각오로 생활하였다. 예수회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2]였는데, 교황청과 가톨릭이 바라는 여러 면모를 예수회 수사들이 발군의 실력으로 보여주게 된다.



예수회 수사들은 수도 생활을 통해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의명분을 알리는 선교, 선동가로서의 자질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개신교에서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으며 개신교의 핵심 교리였던 운명예정설[13]을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회 수사들은 선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극동 지역 선교에 능력을 발휘하여 교황청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된다. 이들은 또 교육에 열의를 가져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되지 않는 한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데카르트[14]에게 당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수준 높은 수학을 가르친 사람들도 바로 예수회 수사들이었다. [15]



물론 가톨릭 국가의 군주들을 압박하여 이교도들에게 냉혹한 박해를 종용하고 심지어 이미 사라진 종교재판소를 이들의 영향권 안에 있던 국가에 새롭게 설치하는 등의 반 시대적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3) 종교개혁, 반 종교개혁의 영향


철학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종교개혁이나 반 종교개혁은 모두 철학 발전의 거대한 흐름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의견도 있는데, 이 두 사건은 결국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쳐 극단적인 종교적 태도가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6]



[1] 서양철학사, 버트란트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19. 677쪽



[2]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중부 독일 비텐베르크(지금의 할레시 부근) 대학교의 교수이자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16세기 천주교에서 로마의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교황청이 대량으로 판매하여 비리가 발생한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이라고 비판하였다. 1517년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95개 논제를 게시하여 당시 면죄부를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자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루터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으로 종교 개혁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3] 장 칼뱅 (프랑스어: Jean Calvin, 영어: John Calvin 1509~1567)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것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를 강조하였고, 개혁주의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의 시초를 놓았으며,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4]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Sanctus Ignatius de Loyola, 1491~1556), 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 Ignacio de Loyola)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은수자(hermit - 외딴곳에 혼자 사는 수도자)이자 신학자.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지도자로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교회의 권위와 제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을 강조하였다.



[5] 히포의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430년)는 4세기 북아프리카인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보편교회 시기의 신학자이자 성직자, 주교로,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6] 고백록(Confessions, 397년~400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기독교의 고전.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 자기애만 가득했던 지난날을 신께 고백하고 자기애를 신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록한 작품이다.




[7] 대사(大赦) 교리: 대사(大赦, Indulgentia) 또는 면벌(免罰), 대사부(大赦符)는 라틴어로 ‘은혜’ 또는 ‘관대한 용서’라는 뜻이다. 가톨릭교회의 신학을 따르면 교황이 지닌 일종의 종교적 죄의 처벌에 대한 '사면권'이다.




[8] 수장령 (Acts of Supremacy, 首長令) 또는 수장법은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교회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법령이다.




[9] 유럽 종교전쟁(European wars of religion)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서유럽, 중앙유럽, 북유럽을 휩쓴 일련의 종교전쟁.




[10]즉 ‘자유주의’란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모든 인간의 생활에서 이 ‘자유’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풀이될 수 있다. ‘자유주의’는 근대사회의 가치 및 제도를 창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자유주의’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보증하며, 인간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권리(천부인권)를 지닌다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입헌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등 정치, 경제제도와 결합하여 근대사회를 이루는 틀로 성장하였다. (중학교 철학, 김준식, 교육과학사, 2021. 108쪽)




[11] 예수회(Jesuits): 가톨릭교회의 엄밀한 학문과 군대식 조직으로 알려진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는 1539년 로욜라에 의해 창립되어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예수회는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들의 지적인 독립성과 수도회의 지침은 교황청에게 위협이 되기도 했으며, 자주 유럽의 정치적 분쟁(특히 유럽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전쟁 시기)에 뒤얽히기도 했다.




[12] 트리엔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트리덴틴)와 볼로냐에 소집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의회이다.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인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출현에 자극받은 반종교개혁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누가 이단이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이단인가'를 밝혀 가톨릭 신앙 교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빠르게 개신교화 되고 있던 유럽을 다시 가톨릭화 하려는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가톨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수행되었다.




[13] 운명예정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이론에서 출발하는 이 이론은 개신교의 논리로 채택되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선택받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보는 것은 기독교계의 교리이나 이에 더 나아가 구원 이전에 예정이 있었다고 보는 신학 이론이다.




[14]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학문의 제1 원리를 하여 다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고, 이를 다시 물질세계의 진리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마련하여, 마침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물질세계의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의 순서를 제시한다. 물질세계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공간이며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이후 많은 학자들을 자극하여 자연과학과 수학에 있어서 급격한 발전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서양 세계가 중세를 벗어나게 된 동력을 데카르트가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15] 예수회 계열 학교인 라플레슈(La Flèche)에 입학해 8년을 공부함.




[16]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이 두 사건의 영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30년 전쟁(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즉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으로, 개신교도나 가톨릭교도 가운데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승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의 통일을 바라는 중세적 소망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철학사, 버트란트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19. 6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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