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중학교 철학수업 (69)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by 김준식
Thomas_More_Utopia_1516_VTOPIAE_INSVLAE_FIGVRA_(Bibliothèque_Nationale_de_France).jpg 1516년 12월 Dirk Martens에 의해 발행한 초판본 표지


나) 토머스 모어[1]와 유토피아[2]


1)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경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앞서 소개한 에라스뮈스보다는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지는 몰라도 후세에 미친 영향력은 에라스뮈스에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경건한 인문주의자였고 동시에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가 처형된 이유 또한 거대한 정치적 대의명분을 위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 왕과의 대수롭지 않은 갈등 때문이었다. 즉, 그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신앙이나 정치체제에 자신의 삶을 건 반대나 저항을 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이고 그것이 비슷한 시대 자신의 삶을 건 모험을 잠시라도 감행했던 에라스뮈스보다 덜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든 이유일 것이다.


그는 변호사였던 부친의 영향력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1504년 의회의 의원이 된다. '헨리 8세[3]'에 의해 중용된 그는 1529년 대법관에 임용되었는데 매우 현명한 판결과 청렴한 처세로 인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이혼에 대하여 강경하게 반대한 문제로 마침내 '헨리 8세'의 총애를 잃게 된다. 마침내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선포하고 모어에게 서명을 요구하였지만 모어는 서명을 거부하였고, 이에 대역죄로 기소되어 1535년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


2) 유토피아


모어의 책 《유토피아》에 의하면 ‘유토피아’는 지구의 남반구 어디쯤 있는 섬으로서 이 섬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라파엘 히틀로다이오(영어식 발음은 히슬로데이)'인데 우연히 그 섬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살다가 그 섬의 슬기로운 제도를 알리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4]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하는데 사유재산을 인정하면 공공선을 증진하기 어려우며 정치적 통제의 형태인 공산제 없이는 평등의 실현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유토피아’에 세워진 54개의 도시는 그중 하나가 수도라는 것을 빼고는 모두 같은 계획안에 의해 설계되었다. 문에는 자물쇠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누구든 아무 집에나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10년마다 집을 바꾸는데 이것은 소유권의 개념을 없애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시골에는 농장이 있고 하나의 농장에는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일을 한다. 이 농장은 나이가 지긋한 남, 녀 각 한 명이 지도하에 운영된다. 모든 사람들은 하루 6시간 일을 한다. 즉,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3시간씩 일을 한다. 8시에 잠자리에 들고 또 8시간을 자며 이른 아침에는 공동의 강의가 있지만 강제성은 없다. 6시간 일을 해도 경제적으로 충분한 것은 게으름뱅이가 없고 쓸모없는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에서는 일부 사람들을 뽑아 지식인이 되도록 교육하는데, 그들이 교육에 충실하다면 다른 생산적인 일은 면제된다. 이들 중에서 정부 관련 업무를 할 사람을 뽑는다. 정치 체제는 대의 민주제이며 수장은 왕으로서 선출되지만 종신제이다. 더러는 쫓겨나기도 한다.


가족생활은 가장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특이한 점은 결혼한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가 나이 들어 힘이 없을 때까지 아버지의 지도를 받는다. 결혼은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매우 엄격한 요건을 준수하였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이혼도 허락하였다.


‘유토피아’에서도 외국과 무역을 하는데 무역의 핵심은 ‘유토피아’ 섬에서 생산되지 않는 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철을 확보한다는 것은 당연히 전쟁을 가정한 것으로서 남녀 모두 전쟁 기술을 익혔다.


3) 《유토피아》의 한계


놀라우리만큼 자유주의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유토피아’지만 몇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모어가 살았던 16세기에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부분이 많지만 여전히 16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도 많이 보인다.


먼저 ‘노예제도’를 가정한다. 《유토피아》 전체에 노예제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결혼 제도, 농장 제도, 그리고 전쟁 상황에서 노예제도를 가정하고 있다.


둘째 가톨릭(교회)과 공산주의 체제의 혼선이다.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인이었던 모어에게 교회는 여전히 평등과 공유의 상징이었던 모양이다. 당시에 이미 교회는 부패가 만연하였고 성직자는 타락해 있었다. 하지만 《유토피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사유재산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유토피아’ 사람들이 알게 되자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에서 모어가 가진 기독교 가치관의 한계를 알 수 있다.[5]


셋째 모어의 삶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이다. 모어가 서술한 《유토피아》에서는 언제나 지루한 일상들이 연속된다. 범죄의 위협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지만 삶이 행복해지려면 삶에는 반드시 다양성과 그에 따른 변화와 위험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위험을 이겨내고 느끼는 만족감이 삶에서 느끼는 행복의 근원이다. 하지만 ‘유토피아’에서는 다양성과 변화가 거의 없다. 아니 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통해 당시의 기준으로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구상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사회는 존재할 수도 없으며 동시에 존재해서도 안 되는 사회일지 모른다.


[1]

토머스 모어(Sir Thomas More, Saint Thomas More 1478~1537) 잉글랜드 출신의 법률가이자 저술가, 인문주의 사상가, 정치가.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 시절에 토머스 모어를 성인으로 시성함. 영국의 성공회 교회는 1980년에 이르러 마침내 성인으로 대우하여 교회력에 이름을 올려 줌.




[2]

유토피아(Utopia): 토머스 모어가 1516년 발표한 그의 책 제목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리스어의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써 ‘어디에도 없는 장소(no place)’라는 뜻으로 모어가 의도적으로 지명에 사용하였다. 즉,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이상향理想鄕이라고 부른다. 반의어로는 ‘디스토피아’가 있다.




[3]

헨리 8세(Henry VIII, 1491 ~ 1547)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 ~ 1547).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이었던 ‘아서 튜더’가 요절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되었다. 형수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 지 20년 만에 별거하였다. 이에 자신의 정부였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혼인 무효화(이혼)를 허락하지 않아 교황청과 갈등을 겪었다. 마침내 그는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4]

유토피아,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2020. 9쪽, 토머스 모어가 페터 힐레스에게 보낸 서신 1




[5]

앞의 책. 112쪽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좇아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삶을 살았고, 지금도 기독교인 중에서 참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기뻐했습니다. …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우리 종교를 받아들였고, 세례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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