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중학교 철학수업(73)

by 김준식

이번 주는 목요일에 출장이 있어 화요일(내일 오후)에 철학 수업이 있다. 저번 주 주제인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끝으로 4. 중세의 갈등과 새로운 도전을 끝내고 이번 주부터는 5.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이란 주제로 4월 둘째 주까지 수업할 예정이다.


중세의 갈등에서 다룬 대표적인 인물이 ‘에라스뮈스’와 ‘토마스 무어’인데 그들은 당시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기는 했으나 결코 그것에 저항할 정도의 에너지는 없었다. 에라스뮈스는 루터와 교류했으나 나중에는 루터와 단절하였고 모어는 종교적 저항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저항으로 어이없게 목숨을 잃는 정도였다. 하지만 변증의 거대한 산맥 속에서 이들은 다음에 등장하는 종교개혁(다소 애매한 표현이기는 하다.)의 마중물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


* 종교개혁이라는 용어: 영어 ‘Reformation’은 라틴어 ‘reformacioun’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뜻은 ‘restoration’, ‘re-establishment’(둘 다 ‘복구’ ‘재건’의 뜻)이다. 그러면 종교 개혁이란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왜 개혁이라는 말을 썼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든다. 웹스터 사전에는 ‘Reformation’을 이렇게 풀이해놓고 있다. 16세기 종교운동으로 궁극적으로는 일부 로마 가톨릭 교리의 거부 또는 수정을 통한 개신교 교회의의 성립과 실천을 특징으로 한다. 개혁이라는 말을 고민해본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둘 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이 지적인 문명의 발전이 앞선 이탈리아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이었다.[1]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의미와 조금 다른 견해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두 개의 사건은 종교적 신학적 반항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부분이 사실은 정치적인 반항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선택적으로 종교개혁, 혹은 반종교개혁으로 명명된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은 교황이라는 권위에 대한 거부이자 동시에 저항이었다. 마찬가지로 반종교개혁은 르네상스로 축적된 이탈리아의 도덕적인 자유에 대한 반항으로 보기도 한다.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루터[2], 칼뱅[3]이 있고 반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은 로욜라[4]였다.



1) 루터의 영향


서양 철학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은 철학의 시계를 천년 전으로 되돌려 다시 성 아우구스티누스[5]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적 영광을 구현하는 몇 가지 기초로 전락한 철학적 논의가, 그나마 있었던 그 동안의 진척을 접고 다시 과거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핵심이 바로 플라톤의 이원론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그의 신학적 열망의 중요한 도구였을 것인데 그의 저서 『고백록』[6]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신학)적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계승이었다. 플라톤 철학은 철저한 이원론에 기초한 철학이다. 즉 두 개의 세계, ‘이데아’와 ‘현실’을 구분하고 그것으로 모든 세계를 이해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이데아’를 ‘신’(창조주)으로 바꾸고 ‘현실’을 신에 의한 ‘피조물’로 대치시켰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으로 ‘영혼’과 ‘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을 강조하고 이원론적 논의의 밖에 있던 ‘교회’에 관한 부분을 강조하지 않았다. 루터의 이런 태도는 매우 의도적이었는데, 당시의 교회가 가졌던 권력을 약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사교리大赦敎理’[7]를 거부했는데, 대사가 남발되면서(면죄부) 이것을 대가로 교회가 거둬들인 돈이 교황청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것이 종교 개혁의 핵심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군주가 개신교도인 나라에서는 군주를 교회의 수장으로 분명하게 인정하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루터에게 교회는 ‘영혼’과 ‘신’의 문제 다음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입장(개신교의 입장)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의 헨리 8세는 루터의 이러한 입장을 이용하여 교황권에 눌린 왕권 강화를 기도하였고 그 결과 헨리 8세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는데 일단은 성공하게 된다.[8] 이 사건을 계기로 인근의 독일,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등의 군주들도 이러한 태도를 적극 수용하여 기존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개신교를 국교로 삼아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가지는 본질적인 부분 중 하나가 개인주의적 측면이었는데 개신교도들은 카톨릭 신자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큼이나 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국가가 종교 문제를 결정하는 문제를 두고 오랜 갈등의 과정[9]을 겪게 된다. 거의 100년에 걸친 지루하고 명분 없는 싸움의 끝에 사람들은 종교 간의 첨예한 반목에 염증을 느꼈고 마침내 종교적 관용의 기운들이 싹텄으며 변증법적인 결과에 따라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18세기 19 세기 자유주의 [10]의 바탕이 되었다.



[1] 서양철학사, 버트란트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19. 677쪽




[2]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중부 독일 비텐베르크(지금의 할레시 부근) 대학교의 교수이자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16세기 천주교에서 로마의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교황청이 대량으로 판매하여 비리가 발생한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이라고 비판하였다. 1517년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95개 논제를 게시하여 당시 면죄부를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자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루터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 당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으로 종교 개혁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3]장 칼뱅 (프랑스어: Jean Calvin, 영어: John Calvin 1509~1567)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것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를 강조하였고, 개혁주의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의 시초를 놓았으며,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4]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Sanctus Ignatius de Loyola, 1491~1556), 이냐시오 데 로욜라(스페인어: Ignacio de Loyola)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은수자(hermit -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수도자)이자 신학자.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지도자로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교회의 권위와 제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을 강조하였다.




[5]히포의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430년)는 4세기 북아프리카인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보편교회 시기의 신학자이자 성직자, 주교로,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6]고백록(Confessions, 397년~400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기독교의 고전.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 자기애만 가득했던 지난 날을 신께 고백하고 자기애를 신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록한 작품이다.




[7]대사(大赦) 교리: 대사(大赦, Indulgentia) 또는 면벌(免罰), 대사부(大赦符)는 라틴어로 ‘은혜’ 또는 ‘관대한 용서’라는 뜻이다. 가톨릭교회의 신학을 따르면 교황이 지닌 일종의 종교적 죄의 처벌에 대한 '사면권'이다.




[8]수장령 (Acts of Supremacy, 首長令) 또는 수장법은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교회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한 법령이다.




[9]유럽 종교전쟁(European wars of religion)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서유럽, 중앙유럽, 북유럽을 휩쓴 일련의 종교전쟁.




[10]즉 ‘자유주의’란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모든 인간의 생활에서 이 ‘자유’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풀이될 수 있다. ‘자유주의’는 근대사회의 가치 및 제도를 창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자유주의’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보증하며, 인간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권리(천부인권)를 지닌다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입헌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등 정치, 경제제도와 결합하여 근대사회를 이루는 틀로 성장하였다. (중학교 철학, 김준식, 교육과학사, 2021.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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