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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r 29. 2023

관계의 역학

3월 29일 오후, 관계의 역학을 생각하며.


3월이 끝나가는 오후 시간, 아파트 앞산 사이사이로 흰 꽃이 선명하다. 지난봄 이후로 나무들은 줄곧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왔을 것이다. 또 지금 저 꽃잎이 바람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 열매를 맺고 떨어지면 변함없이 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벌써 몇 억년 동안을 저 나무들은 그 일을 반복해 왔고 나는 나의 삶 동안 그 모습을 관찰할 것이고 때가 되면 또, 그렇게 나무들로부터 나의 짧은 삶은 잊힐 것이다.


나와 나무들, 혹은 꽃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총량은 우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안타깝게도 너무 짧아 이렇다 할 관계의 정립이 되기도 전에 나는 소멸할 것이고, 나무 또한 그 소멸의 궤적에서 예외일 수 없다. 하여 나무와 내가, 꽃과 내가 서로 마주하는 이 순간은 우주 전체에서 기막힌 우연의 순간이며 너무나 짧아 수치화조차 어려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 내가 바라 봄으로서 비로소 흰 꽃과 나무가 존재하니 이것을 ‘현상現象’이라고 가정한다면 나의 시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저 흰 꽃과 나무의 존재는 내가 보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봄으로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 불분명해진다. 


물론 당연히 저 흰 꽃과 나무는 나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또 존재할 것이지만 나와의 관계라는 지극히 한정된 범위 안에서는 나의 인지를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분명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 상황도 어쩌면 나 외의 모든, 또는 어떤 것으로부터 관계의 역학이 작용하여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에 대한 논리적이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기는 매우 어렵다.


관계의 역학이 미치지 않는 곳은 우주에서 단 한 곳도 없다고 본다면 나의 존재로부터 동시에 저 꽃과 나무도 존재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애 당초 인식했던 내가 나무와 꽃을 보는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이 기막힌 변증적 논리의 끝에 무수하게 가지를 뻗는 실체와 관계에 대한 생각으로 짧은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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