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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pr 02. 2023

逍遙

어슬렁거리다.

토요일 하루를 몸도 마음도 어슬렁거리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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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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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표준 시계는 원자시계인데 세슘-133 원자의 복사파가 9,192,631,770회 진동하는 시간을 1초로 삼는다. 약 8천만 년 만에 1초 오차가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스트론튬 원자를 이용하여 2억 년 동안 1초의 오차가 있는 시계를 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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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한하고 동시에 유한하며 또 광대무변하기도 하고 매우 촘촘하여 그 틈이 없는 절대적이며 공간적인 하나의 사태(事態 – 영어 Situation, 독어 Alltagsdinge)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후 긴 시간 동안 지구에서 시간의 절대적 기준은 태양이다. 즉, 빛과 어둠이라는 현상이 인류에게 ‘시간’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도출하게 하였고 인류 역사와 함께 그 개념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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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에 어슬렁 거리며 지내는 방법이 있다. 한자로 쓰면 소요逍遙가 된다. 사실 서양에서는 이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없다.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되지만 좀 더 깊게 관찰해 보면 서양에서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생산적이 아닌 일이며 동시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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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Peripatetic school)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소요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지내던 건물인  Lyceum(리시움 – Lykeion : 리케이온)의 복도, 즉 Peripatoi(Colonnade – 복도, 회랑)를 따라 이동하며 철학적 논의를 하였다는 것의 의미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의역(거의 오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된 것을 우리 학계에서 비판도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쓴 것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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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철학적인 대화와 논의를 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어슬렁거리는(시간과는 무관하게 지내는 모습) 것이 아니라 다만 조금 천천히 걸으며 철학적 논의를 진행하는 모습, 즉 시간을 잘 활용하였던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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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자 소요逍遙의 글자적 의미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즉 逍는 肖(닮을 초) + 辵(쉬엄쉬엄 갈 착)의 뜻이니 말 그대로 시간을 느릿하게 보내며 걷는 것이요, 遙는 䍃(질그릇 요) + 辵(쉬엄쉬엄 갈 착) 즉 무거운 질그릇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두 글자가 붙어 쉬엄쉬엄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처럼 일정한 대화를 나눈다거나 아니면 일정한 경로를 따라 걷는다는 의미를 소요에서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소요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며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로서 쉬엄쉬엄 걷는, 이를테면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경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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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소요는 이미 멀어졌다. 9,192,631,770회의 반복을 1초로 하는 너무나 정밀하고 엄격한 시간이라는 절대적 괴물 앞에 다만 적응하고 순종하며 살아갈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리시움의 복도를 거닐면서 고민했던 그 수많은 철학적 명제와 논리들도, 그저 어슬렁어슬렁 쉬엄쉬엄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능한 동양의 ‘소요’도 오늘날의 이 기막힌 정교함과 치밀함 앞에서는 무용하거나 동시에 무가치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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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하루 종일 봄 볕 치고는 다소 뜨거운 태양 밑을 하루 종일 어슬렁거리기는 했지만 시간에 지배당하는 나를 문득 발견한다. 미세한 내 마음의 공간에서 절대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고자 소요하려 하지만 그 길은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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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사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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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히 머리를 정리한 선비께서 듬성듬성 나무가 있는 숲길을 걷고 있다. 청수淸秀한 선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조선의 선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식의 특성상 그의 옷은 중국의 漢服(중국식 발음으로 한푸) 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선비들이 갓을 쓰지 않았을 때 쓰던 탕건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그를 중국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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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逍遙라는 말을 붙이고 있다. 소요라 함은 노, 장의 이야기로부터 유래한다. 특히 ‘장자’라는 책의 첫 편에 소요하면서 노닌다는 뜻의 逍遙遊가 등장한다. 이 경지는 매우 난해하여 여러 가지 비유가 등장한다. 결국 소요유란 사물의 본래 경지를 이해하고 분별이 없는 상황에서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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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이 그 경지를 이해하고 이런 문인화를 그렸는지 혹은 그 경지를 흠모하며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완당이 그린 高士와 그 高士가 이룬 소요의 경지는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조선 시대가 유교 중심의 사회였고 유교적 최고 경지는 군자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그림의 경지는 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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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의 문인화 중 최고의 경지는 단연 세한도이다. 고사소요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세한도는 완당의 유배생활에서 오는 외로움이 그림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고사소요의 분위기는 세한도가 가지는 孤高함에 孤寂을 더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고 그저 孤高함만 있다. 그리고 거기에 세한도의 풍경보다는 보다 부드럽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거친 준법皴法(산과 바위, 또는 나무 표면의 질감과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붓을 활용하는 방법)이 오히려 그림의 깊이를 더해준다. 완당의 계획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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