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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앞의 여자

피의자 박근혜 소환

by 김준식
파도!!

검찰청 앞의 여자


2016년 10월 이후 거의 매 주말마다 열리는 집회 참가의 부담을 느끼면서 그중, 몇 번은 경남 진주에서 서울 광화문 광장까지 상당한 거리를 오간 기억이 있다. 그 기간 동안 나와 같은 이 나라 국민들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탄핵 인용을 외쳤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마침내 지난 3월 10일 현직 대통령을 파면하였는데, 판결문 중 “피청구인의 법 위배 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의 대목에서 가슴 벅차 오름을 느낀 것은 비단 나 만은 아닐 것이다.



정의란 매우 모호한 개념이 분명하다. 고대 로마 페니키아 출신의 유명한 법학자 울피아누스(Domitius Ulpianus 170? ~ 228)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항상 부단의 의지”라고 정의를 규정지었지만이 울피아누스의 이야기는 신분제적 뉘앙스가 강하게 스며 있어 현재의 정의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현대 정의론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피력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그 절대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분명하게 정의를 인지하고 있다. 규정할 수 없다고 하여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사람 1600만 명이 촛불을 들어 이 시대의 정의를 외쳤고, 헌법재판소는 그 외침을 법적으로 증명, 확인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의 정의는 탄핵 인용으로 인한 대통령 파면이 명백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의의 이름으로 탄핵된 전직 대통령이 오늘 검찰청에 피의자의 신분으로 소환되었다.



웃기는 것은 그 자리에서 그 여자는 “송구”하다고 했다. 悚懼!! 정확한 뜻은 국어사전에 의하면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는 뜻이다. 미안하다는 뜻의 높임말로 쓰려했으나 그 말은 ‘죄송’이 맞는 말이다. 죄스럽다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 다만 두렵고 불편해서 마음이 거북하다는 말을 대 국민용으로 쓰는 전직 대통령의 태도를 이 땅의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를 “마마”라고 부르는 왕조 시대의 사람들이나 그 여자가 사는 집 벽에 태극기와 꽃을 놓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길이 없지만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오늘 그 여자의 태도이며, 여전히 피의자를 보고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고 이동 시 교통통제를 하는 이 땅의 또 다른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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