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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y 22. 2023

誤解와 無知

誤解와 無知

誤解와 無知

내가 말하는 바가 늘 내 의도하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는 없다. 동시에 상대방의 이야기도 늘 나에게 상대방의 의도대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각자 수용의 막(필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라는 단어가 생겼을 것이다. 


오해의 핵심은 각자에게 있는 필터와 그것의 견고성에 있다. 유연하지 못함이 오해의 원인이라는 뜻인데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이야기는 상대방의 몫이기 때문에 나의 오해는 온전히 나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타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자신의 잘못도 정확히 절반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을 상대의 잘못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며칠 전 나에게 ‘종북’을 운운했던 친구가 오전에 전화를 해서 당시 자신이 한 말을 ‘오해’ 하지 말라고 했다. 사실 나는 오해한 것이 없다. 그의 말에서 오해할 만한 어떤 부분도 없었고, 또 그의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복잡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은 오해 없이 그대로 나에게 받아들여졌는데 다만 그 말이 나를 불쾌하고 화나게 했을 뿐이다. 그럼 오해 없이 받아들인 말이 왜 나를 불쾌하고 화나게 했을까? 오해가 없다면 그대로 수용하면 될 일인데.


친구의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의 무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무지의 상태에서 한 말이니 무시해야 하는 것이 옳은데 나는 왜 불쾌하고 화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무지(종북에 대한, 좌익에 대한, 현 상황의 판단에 대한… 등등의 무지)는 이미 그 친구의 마음속에서 진실이 되었고 어떤 설명과 설득에도 절대 물러서지 못하는 상황으로 굳어진 무지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무지를 기반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상대를 비난하며 공격하는 바탕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무지가 상대를 향하는 것도 무서운 문제지만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 더 무섭고 난감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그 무지는 자신의 삶에서 반성의 기회를 뺏고 통찰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무지이며 시대정신이라는 명제를 도외시하고 마침내 자존의 턱을 한 없이 낮추어 특정 집단의 이익에 종속되기 쉬운 단계에 이르게 된다. 지금 이 나라에 퍼져있는 무서운 무관심과 회피 역시 이 무지의 한 갈래에서 나오는 속성이기도 하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오해한 것이 아니라 그 친구를 설득하지 못하는 낭패감에 더욱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기준으로 본다면 사실 진실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수많은 조건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 조건, 즉 기준으로 한정된 부분에 진실이 있을 수 있다. 진실이라는 것을 이렇게 한정해 놓는다면 우리에게 진실을 분명 있다. 그 기준(조건)이 역사라면 역사적 진실일 것이고 민족이라면 민족적 진실일 것이다. 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무지이다. 그 무지는 극단적 자기 비하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 친구의 말은 나에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 다만 그의 무지를 일깨울 수 없는 난감함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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