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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y 24. 2023

부처의 탄생을 앞두고

부처의 탄생을 앞두고


모레는 음력 사 월 팔일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이다. 그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여래(如來 – 부처를 부르는 열 개의 이름 중 하나)가 되었고, 또 그 깨달음의 법을 설하여 인류의 대 스승이 되었는데 이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전히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부처는 수많은 방편(方便, 산스크리트어 upaya)을 통해 그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방편이란 편리하고 교묘한 방법이란 말로써 중생의 근기(根機- 수준)에 맞게 여러 가지 대안으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각자의 상황과 기질에 맞는 최선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접근하다’, ‘도달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아무리 방편을 사용하여 설명해도 깨달음이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지임이 분명하다. 더불어 너무 방편을 많이 시용하다 보니 방편이 본질을 가려 이제는 방편과 본질을 구분하기조차 애매해졌다. 어쨌거나 부처의 절대 경지는 우리의 의식 수준으로 따라잡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가 아는 불경은 부처가 직접 쓴 글은 단 한자도 없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부처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와 만나는 것인데 여기에 만만치 않은 오류들이 존재하고 엄청난 시간을 거치면서 그 오류는 한 없이 증폭되고 또 더 큰 오류로 파생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따라 잡기가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요체가 무엇이든 간에 부처가 깨닫는 순간은 범 우주적 사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시공간에서 인간의 사고 능력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에서 아직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가 없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부처의 깨달음은 우주적 사건에 비견될 만하다. 


화엄경 적멸도량회 제1 품에 따르면 부처의 깨달음이 있던 그 순간 삼천 대천 세계가 모두 그 경지를 찬탄했다고 되어 있는데 삼천 대천 세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 즉 태양계와 같은 규모의 세계가 천 개 정도 모인 것을 소천(은하)이라 하고, 그것이 다시 천 개 정도를 중천(은하계)이라 하며 또 그것이 천 개 정도 모이면 대천이 되는데 이것은 현대적 의미로 우주를 뜻하는 말이다. 다시 그것이 삼 천 개 정도 모이니 현재 확장하고 있는 우주와 흡사한 규모가 된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대정장 27)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삼천 대천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 경전 이전에 브라만교의 고대 경전인 베다에서도 발견되는 이야기이므로 고대 인도의 범 우주적 세계관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The Rig Veda/Mandala 2/Hymn 3)


어쨌거나 우주적 사건인 깨달음이 있고 그것이 발현되는 과정은 우주적 판타지 소설처럼 화엄경에 묘사되어 있다.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이며 극적인 정신적 사태를 불교에서는 형상화하여 바이로차나(비로자나불)라고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하면 법신이라 표기한다.(이 비로자나불이 있는 절 건물은 대부분 비로전인데 그 건물이 중심 건물이 되면 그 건물의 이름은 대적광전 <해인사가 대표적>이 된다.)


법신이 태 허공(우주)에 빛을 뿜으면 삼천 대천 세계에 존재하고 있던 보살(菩薩)들이 일제히 법신(바이로차나)에게 다가온다. (마치 예수가 탄생한 순간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었던 것처럼)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로서, 산스크리트어 보디사뜨바(Bodhisattva)를 음(音)역한 것으로 보디 Bodhi와 sattva 사트바 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리와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의미하며, 살타와 사트바(sattva)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으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깨달음과 중생을 합친 개념이다.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생명체’란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우주적인 사건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부처의 탄생이란 매우 의미가 있는 날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가 이룬 상황은 이렇게 거창하고 아름다웠는데 오늘날 이 땅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어떤가? 몇 년 전 부처의 경지는 너무 멀고 힘들어서 도박으로나마 그 경지를 이루려 했는지는 몰라도 수행자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출가승려가 도박을 하고 심지어 외국에까지 나가 도박을 했다 하니 어떤 면에서 이것도 매우 우주적인 사건이 틀림없다. 그런데 검찰은 이 사건의 공소를 기각하고 말았다. 증거 불충분이라는 것이 그 주요한 이유였다. 아마도 종단 고위층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 역시 우주적인 사건이다. 


또 있다. 역시 몇 년 전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33대(현재는 36대) 총무원장 자승과 관련된 도박추문이 확산되자 당시 호법부 수장이었던 모 승려는 몇 백만 원의 판돈도 되지 않는 심심풀이였다고 언론에 설명했다. 심심풀이? 서민들이 한 달 내내 일해서 버는 돈이 고작 백만 원 정도인데 수백만 원이 심심풀이라니! 출가 수행하니 간이 너무 커진 것인가?  종교라는 간판을 걸고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도박을 하는 수행자가 버젓이, 그것도 잘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우주적 사건으로서 깨달음의 주인공인 부처의 탄생이 돌연 무가치해지는 느낌이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이 나라에 들어온 지 벌서 1600여 년이나 흘렀다. 부처의 탄생이 2567년 전이니 부처 사후 거의 천 년이 지나 이 땅에 불교라는 종교가 들어왔다. 왕실이 받아들인 불교였으므로 지배세력에게 유리한 종교적 장치들만 비대해졌고 백성들의 삶과 유리된 지배적인 종교적 교의들이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우리 불교 역사의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백성들은 불교적 세계관이 제공하는 다음 생을 희망으로 버티며 언제가 오게 될 미륵불(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를 기다렸다. 오라는 미륵은 내내 오지 않고 도박과 탐욕의 수행자들만 세상에 들끓고 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종교든 그 종교적 집단이 비대해지면 거기에는 탐욕이 싹트게 된다.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깨달음이라는 매우 극적인 사건의 당사자인 부처가 이 세계에 온 날을 기념하는 저 색색의 허접한 플라스틱 등이 바람에 흔들리는 밤, 남섬부주의 한 중생인 나는, 중중무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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