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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25. 2023

인식론을 위한 기초작업

1.     변방에서


2023년 6월 25일 오늘, 문득 생각해 보니 60대 초반에 접어든 나의 삶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중심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늘 변방을 떠 돌았고, 스스로 주변부를 지향하며 애써 태연한 척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방에서 성장한 나는, 젊은 시절 한 때 중심부의 삶으로 진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몰리듯 다시 변방으로 돌아왔고 잠시 중심부를 향했던 나의 욕망은 이제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변방에서의 삶은 자칫 소홀해지기 쉽다. 스스로 가치부여를 하지 않는 순간 자신의 삶은 초라해지거나 혹은 가벼워지고 만다. 하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변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여전히 회자되는 것으로 보아 모두 그렇게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소홀해지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 보지만 늘 한계를 느낀다. 그러면 중심은 무엇이며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사실 중심은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이다.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자기 위안적 動機를 두고서라도 중심에 대한 견해는 다분히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중심은 개인이 이루고자 했던 최고의 목표가 실현되었을 경우의 삶과, 그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라고 가정해 두자. 이렇게 가정해 보니 더욱 내가 변방에 있음을 알겠다. 즉, 내 삶은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목표를 이룬 적이 없고 제법 그 목표에 근접했다가도 그만 돌아선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이루고자 했던 최고의 목표란 지극히 세속적인 것으로서 신분, 혹은 지위의 상승과 그로부터 기대되는 여러 가지의 시혜일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 그 목표를 이뤘다면 아마도 그곳에서 다시 더 깊은 중심을 꿈꾸며 스스로를 변방이라 여기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현재의 내 삶은 어쩌면 변방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순환 논리에 기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변방이라는 의식을 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스스로 변방에 있을 것이라는 이 생각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마음먹기로 한 것일 수도 있다.


2.     직관 直觀, Intuition


마음먹기로 했다는 바탕에는, 마침내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배워서 알게 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배워서 아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니 논외로 하고, 이미 알고 있었다 라면 언제부터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이유가 존재해야만 한다. 즉 인식의 기초에 대한 논의이다. 


인식의 기초에는 ‘직관’이 있다. 


직관이란 판단이나 추론 등을 개입시키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작용이고, 사유(思惟) 혹은 추리(推理)와 대립되는 인식능력이나 작용이다. 


어원은 라틴어의 ‘Intuere’(응시한다)이다. 인위적인 사유(思惟) 작용을 통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작용을 말한다.


사유가 반성(反省)과 분석(分析)을 통해 사태의 각 부분을 파악하는 데 반해, 직관은 순간 속에서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만 분석처럼 명확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직관하는 사람 스스로는 대상이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선 불교의 고승들이 이룬 깨우침의 경지와 같다.  


직관은 어떤 사상(事象 – 눈에 비치는 사물의 모습)에 대한 비반성적(非反省的) 공감(共感), 즉 자아(自我)와 사상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경험적 직관과 본질적 직관으로 구분될 수 있다. 


경험적 직관이란 사상을 순간적으로 직감(直感)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표정에서 그의 감정의 상태를 짐작한다든지 타인의 첫인상에서 장래 그와의 관계를 헤아리든지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개인적 정신능력이나 판단에 기초하기 때문에 상당히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다. 이에 반해 본질적 직관이란 경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으로서 기하학적 공리에 대한 인식이 여기에 속한다. 기하학적 공리에 대한 인식이란 힐베르트 좌표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위치를 점유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직관은 사유가 단절되는 데서 발휘되는 인간의 정신능력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R. 데카르트가 말하는 명증지(明證知)로서 분석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의존하는 최고의 인식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직접적 명증성을 지닌다고 여겨지는 점에서는 입장이 같으나 哲學史上 직관을 인간의 전체적인 인식 테두리 안에서 어떤 위치에 둘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차후 논의할 주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모든 사고작용이 직관과 관계를 맺으며, 감성은 직관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고 悟性은 직관 자체를 사유한다고 하였다. 그는 직관을 순수직관과 경험적 직관으로 구분하였다. 경험적 직관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수용된(경험을 가진) 감각을 매개로 한다. 순수직관은 심성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감각에 귀속하는 것을 내포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것은 다시 경험적 직관을 종합하고 추론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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