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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13. 2023

지각, 그리고 상식(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4)

지각, 그리고 상식(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4)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의 대화이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건강한 내가 포도주를 마실 경우, 그것은 내게 즐겁고 달콤한 것으로 나타나는가?


테아이테토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앞서 동의된 것들로 볼 때 그건 바로 다음과 같기 때문이네. 즉, 작용을 가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이, 동시에 운동을 하는 쌍인 달콤함과 지각을 낳는데, 작용을 받는 쪽에서 성립되는 지각은 혀를 지각하는 것이 되게 하고, 포도주 쪽의 달콤함은 그 주위에서 운동을 하여 포도주가 건강한 혀에게 있음에서도 나타남에서도, 달콤한 것으로 되게 하기 때문이네.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옮김, 이카넷, 2022. 73쪽)


포도주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포도주의 달콤함을 느끼게 되는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독창적인 해석이다. 작용을 가하는 쪽(포도주)과 작용을 받는 쪽(소크라테스의 혀)의 협응을 통하여 달콤함이라는 지각에 도달한다는 이야기다. 즉, 달콤함이란 혀에서 지각되었을 때 비로소 달콤함이 되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이 확장된 상황이다. 인간척도설의 근본은 있음을, 인간의 의지로 하여 나타남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의 아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상황을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상식에 대한 노자의 생각을 보자. 《도덕경》 23장에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希言自然 희언자연. 飄風不終朝 표풍부종조 暴雨不終日폭우부종일.


즉, 말을 적게 하면 스스로 그러해진다. 거센 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하니.


앞부분의 ‘희언자연’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풀이가 있다. ‘자연’을 한 덩어리, 즉 명사 ‘자연’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떼어서 말이 적은 것을 꾸미는 말로 볼 것인지에 대한 해석이 많지만 떼어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물론 나 같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붙이든 떼어 놓든 전체적인 의미는 비슷해서, 독립적이든 아니면 뭔가를 꾸미든 구분의 실익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유명한 학자들은 이 작은 부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希言희언에서 ‘언’은 왕이나 국가가 말하는 것, 즉 법률이나 명령을 말하는데(통설) 이것이 적으면 세상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뒷부분은 敷衍부연이다. 아무리 법령이나 명령이 많아도 내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표풍’으로 ‘폭우’로 비유한 것이다.


노자의 이야기는 사실 지극히 상식 수준이다. 아무리 거센 바람일지라도 아침 내내 불 수는 없고 아무리 거센 비도 하루 종일 같은 기세로 내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상식에서 노자는 절대 진리(도)를 찾아내서 이렇게 글로 남긴 것이다. 


그런데 상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근대를 연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상식을 이렇게 말한다. 상식을 그는 양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양식과 상식이 같은 표현인지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데카르트는 양식(상식)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것을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한다.”(방법서설, 데카르트 저 소두영 역, 동서문화사, 2016 제1부, 25쪽) 누구나 아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생각을 데카르트는 상식(양식)이라고 표현했다.


오늘날의 상식은 어떤 사회에 속한 사람이 문화와 지식을 습득하면서 당연히 알게 되고 또는 믿는 가치 또는 개념이다. 상식의 문제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基準기준- Standard, Criteria의 문제다. 하지만 쉽게 말하면 동일한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 또는 알고 있어야 할 가치와 개념이 상식이다.


그 상식을 동원하여 풀이하자면 세상에 법령이나 명령이 적어진다면 그것은 세상의 본래 모습(자연스러운 상태)이 되기 때문에 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노자의 말인데 이것은 거의 상식에 가깝다는 말이 된다. 


노자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道는 常識에서 출발한다.”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지각 역시 상식선에서 모두 수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지각과 상식, 그리고 도가 수평선을 그리며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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