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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ug 02. 2023

‘玄同’이야기(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5)

‘玄同’에 대한 이야기(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5)


‘현동’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장자」 ‘재유’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최구崔瞿(장자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가 노담老聃(노자)에게 물었다.


“천하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착하게(安藏人心)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테면 천하를 일정한 규율이나 법칙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려 착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노담’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람들 마음은 제 멋대로인데 옛날 황제(3 황 5제)처럼 仁義로 흔들지도 말고, ‘유가’처럼 ‘신의’와 ‘거짓’으로 사람을 흔들지도 말 것이며 또 ‘법가’처럼 죄를 만들어내지도 말아야 한다. 하여 절성기지絶聖棄知, 천하대치天下大治 즉 성과 지를 끊어야 천하가 크게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 도덕경 19장에 있다. 


‘절지기변絶知棄辯(다른 판 본에는, 절성기지絶聖棄知로 된 것도 있다.) 지혜를 끊고 변설(사고작용)을 버려야 민이백배民利百倍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된다.’


「장자」 ‘거협’에도 절성기지絶聖棄知 대도내지大盜乃止, 聖과 知를 끊어 버려야 큰 도둑이 비로소 없어진다 역시 비슷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玄同’은 말 그대로 현묘한 같음이다. 현묘하다는 말은 의미는 매우 다양할 수 있지만 결국 道와 비슷한 뜻으로 볼 수 있다. 즉 ‘현동’이란 세속의 기준이 사라진 본래 상태로서 근원적인 균형의  상황이라고 상정해 볼 수 있다. 


‘재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현동이 사라지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인데 다시 '현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성기지’ 혹은 ‘절지기변’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도덕경 41장에서 이런 방식으로 설명된다.  


“상사문도上士聞道, 근이행지勤而行之 중사문도中士聞道, 약존약망若存若亡 하사문도下士聞道, 대소지大笑之 불소不笑, 부족이 위도不足以爲道.”


“수준이 높은 선비(지혜로운 사람)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하고, 수준이 중간인 선비(보통)는  도를 듣고 유지하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며, 수준이 낮은 선비(어리석은)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에 미치지 못한다.”


역설적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은 도를 알아보고 도를 따른다는 것이고 보통의 선비는 반신반의하며, 수준이 낮은 하수는 뭔지 모르니 웃어넘긴다는 것인데 마지막 말이 재미있다. 수준이 낮은 사람이 웃어넘기지 않으면 그것은 도라고 말하기에 약간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 말에 ‘현동’의 이미지가 숨어 있다.


뭔가 부족하고 비어 있어야만 도의 본래 모습이라는 노자적 표현인데, 상식적인 세상을 사는 우리 같은 凡人에게 쉽게 수긍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 보인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도덕경 56장에 ‘현동’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지자知者, 불언不言 언자言者, 부지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이를 테면 ‘현동’은 ‘있다’, ‘없다’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그 두 개의 사태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사물은 항상 이러한 상반된 개념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을 통찰하는 것이 어쩌면 ‘현동’ 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론은 「도덕경」과 「장자」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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