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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ug 03. 2023

‘앎’과 ‘지각’(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6)

‘앎’과 ‘지각’, 그리고 ‘기억’(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6)


‘앎’과 ‘지각’의 차이에 대해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한다.


“우리가 봄으로써 지각하거나 들음으로써 지각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들을 지각하는 동시에 알게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우리가 이민족 사람들의 말을 배우기 전이라면 그들이 소리를 내서 말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듣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이 하는 말을 우리가 듣기도 하고 알기도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또, 우리가 글자들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들에 눈길을 줄 때는 그것들을 못 보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보고 있는 한에서 아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할까?”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역, 2022, 이카넷, 83쪽)


풀이해 보자면, 알 수 없는 언어를 듣는 순간에, 그 언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각(청각)으로 전해오는 그들의 언어는 소음 정도일 것이다. 즉 ‘앎’은 ‘지각’을 기초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오히려 ‘지각’이 ‘앎’을 기초로 하여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조금 방향을 틀어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약간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언어는 말하는 이의 표정과 태도, 그리고 상황이 부가되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언어라 할지라도 말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 자리에 있으면 정확한 의미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이해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청각이라는 지각 외에 시각, 그리고 일반적인 5감을 넘어서는 특별한 감각의 교류가 있음을 소크라테스는 간과하고 있다. 즉, 태도와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지각의 범위로 설명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아이테토스’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그것들 중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바로 보고 들은 만큼은 안다고 우린 말할 것입니다. 그것들 중 글자의 모양과 색깔은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하며, 소리의 높낮이는 듣는 동시에 안다고 말입니다.”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역, 2022, 이카넷, 83쪽)


테아이테토스는 태도나 상황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모양이나 색깔, 높낮이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밝힌다. 


‘앎’을 나타내는 한자들 대부분은 말씀 언言이 붙어있는 ‘회의’(뜻을 합쳐서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방식) 또는 ‘형성’(뜻을 나타내는 부분과 음을 나타내는 부분이 합쳐져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 글자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량諒, 식識, 인認, 암諳 등이 있는데 여기서 언言의 역할은 글자 그대로 말, 문자를 의미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로 혹은 방식에 따라 글자가 만들어지고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앎’을 완벽하게 영어로 번역하기는 곤란하지만 유사한 의미로 ‘Knowing’이 있는데 여기서 ‘know’의 어원적 의미는 이런 뜻이 있다. ‘be able to distinguish(구별할 수 있는 능력)’ 과 ‘perceive or understand as a fact or truth(사실과 진실을 이해하거나 수용하는 것)’라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그 조건이나 바탕에는 역시 언어라는 매개체가 있다. 


결국 동 서양의 ‘앎’에 대한 논의는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작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예시는 세부적인 흠결欠缺이 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매우 타당한 예증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등장하는 문제는 기억이다. 


역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보자.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앎’을 갖게 된 경우, 바로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고 보존하고 있다면, 그가 ‘기억’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기억’하는 바로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가?"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역, 2022, 이카넷, 84쪽)


풀이하자면 이런 말이다. 어떤 것을 알고 있고, 알고 있으니 그것에 대한 기억을 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기억이 지속되는 동안에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의미다. 


일단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에는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앎’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부분이 있다. 그 곤란한 지점이 ‘이해理解’인데 이해는 ‘앎’과 기억의 중간에 존재한다. (여기서는 뇌 과학 관련 논의는 보류한다.)


‘이해’는 결국 ‘앎’과 ‘기억’을 연결시키는 다리인데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로 한정해서 본다면 이해의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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