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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Oct 05. 2023

착오판단(allodoxia)과 역설逆說

(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9)

‘플라톤’의 착오판단(allodoxia)과 혜시의 역설逆說


플라톤의 착오판단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그에 기초한 판단을 가리킨다. 여기서 착오錯誤는 매우 좁은 개념인데 거의 앞 뒤가 바뀐 정도의 가벼운 의미로서 우리말의 착오, 즉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인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착오판단의 '착오'는 영어 mismatching(어긋남)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착오판단’은 이런 것들이다. 


‘느리게 빠르거나 무겁게 가벼운 것’, ‘아름다운 것은 단연 추하다.’ ‘불의한 것이 단연 정의롭다.’ ‘홀수는 전적으로 짝수다.’  


돌연 『장자』 속에 ‘혜시’가 생각난다. 그의 이야기는 『장자』 마지막 ‘천하’ 편에 전해진다.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는 중천에 떠오르면서 기울기 시작하고, 사물은 생기는 동시에 죽어간다.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의 끝은 있다.(방향으로서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이라는 특정 지역을 말하는 경우에는 끝이 있다는 뜻)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극단적 모순율)


이어진 고리는 풀 수 있다.(이어진 고리는 고리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뜻)


알에 털이 있다.(닭이나 새에는 깃털이 있는데 알에 털이 없다면 닭이나 새의 깃털이 어디에서 생겼겠느냐는 반론)


닭에는 세 개의 발이 있다.(실재 닭의 발은 둘이다. 그리고 ‘닭의 발’이라는 말[言]을 합치면 모두 셋이 된다는 주장이다. 혜시 사후 2100년 후, 서양의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랑그(사회적이고 체계적인 언어의 측면)와 파롤(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분류했는데 아마도 혜시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원류쯤으로 이해될 수 있다.)


초나라 서울 영郢에 천하가 있다.(공간의 상대성과 무한성)


개는 양이 될 수 있다.(『장자』 덕충부德充符편에 “같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를 논리적 배경으로 본다면 이해될 수 있다.)


불은 뜨겁지 않다.(불이라는 상황 또는 상태는 뜨겁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다. 불을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감각, 지각의 작용이므로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주장, 따라서 불은 뜨겁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산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장자』 제물론齊物論에서 “天下에는 가을 털의 끝보다 큰 것이 없고 太山은 가장 작다 [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太山爲小]와 비슷한 의미)


수레바퀴는 땅에 붙어 있지 않다.(1800년이 지난 뒤 뉴턴에 의해 발명된 미분적 사고의 시작점이다.)


눈은 보지 못한다.(본다는 것은 눈의 작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빛이라는 매개체가 존재하여야만 가능하다.)


곱자로 네모를 그릴 수 없고 그림쇠로 원을 그릴 수 없다.(“그림쇠와 곱자는 네모와 원을 만드는 지극한 표준이고,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표준이다 [規矩 方圓之至也 聖人 人倫之至也].”라고 하여 보편적 인륜을 강조하는 맹자 이루편의 내용을 반박하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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