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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16. 2023

‘인지적 통로(Epistemicroute)’

(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8)

‘인지적 통로(Epistemicroute)’에 대한 논의

(인식론을 위한 워밍업 8)


“들음을 통해서 지각하게 된 것들은 봄을 통해서는 지각할 수 없고, 봄을 통해서 지각하게 된 것들은 들음을 통해서는 지각할 수 없다. - 소크라테스”(「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번역, 이카넷, 2022. 141쪽)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 흰 것들과 검은 것들을 보며 무엇에 의해서 높은음들과 낮은음들을 듣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내 생각에 자네는 눈과 귀에 의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군!”


‘소크라테스’는 보고 듣는 이 상황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우리가 보고 들어서 안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바탕’(도구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이 내재하고 있었는데, 외부로부터 보고 들은 것들이 내재된 그것들을 자극하여 지각되는 경우이고(지각의 수동성),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수동적 지각들에 의해 불러일으켜지는 또 다른 방식의 지각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각은 매우 다양하고 각각의 지각은 서로 통할 수 없는 독립적인 감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테아이테토스’는 이렇게 상황을 정리한다. 


“선생님께서는 ‘있음’과 ‘있지 않음’, ‘유사성’과 ‘비유사성’, ‘동일성’과 ‘타자성’, 거기다 그것들과 관련된 하나 내지 그 밖의 모든 경우의 수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리고 선생님은, 짝수와 홀수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그 밖의 모든 것과 관련해서 묻고 계신 듯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영혼에 의해서 지각할 때, 몸에 속하는 것들 중 어떤 것을 통해서 지각하게 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번역, 이카넷, 2022. 143쪽)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더 나아가 우리가 받아들인 지각이 그것을 인식하는 바탕 혹은 도구에 의해서만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혹은 그 존재 자체도 모르는 특별한 상황에 의해 인식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누구인가? ‘테아이테토스’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지각’과 ‘앎’을 분리시킨 뒤 ‘테아이테토스’가 말한 내용은 여전히 ‘지각’의 영역이라고 한정한다. 


그리고 다시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논점인 ‘앎’으로 화제를 돌린다. 즉 ‘앎’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는 ‘앎’은 결코 지각의 범주에서만 찾지 않아야 하고, 좀 더 넓고 깊게, 이를테면 영혼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어쩌면 ‘판단(Doxa- Doxa와 Doxasein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상세히 서술)’으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판단’을 ‘앎’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거짓인 ‘판단’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참인 ‘판단’이 ‘앎’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판단’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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