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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Nov 18. 2023

뜻 밖의 선물


1.     여운


존경하는 전종호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저작 두 권(『어머니는 국수를 먹지 않는다』, 중앙&미래, 2023, 『히말라야 팡세』, 중앙&미래, 2023)을 보내셨다. 뜻밖의 선물이라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감히 『어머니는 국수를 먹지 않는다』를 읽고 소감을 올려본다. 문학에 문외한인지라 내가 가진 한치 정도의 얕은 미학적 지식으로 얼버무려본다. 


19세기말 영국 출신의 수필가 ‘월터 페이터’(Walter Horatio Pater 1839~1894)는 “모든 예술이 음악의 상태를 열망한다”라고 말했다. (월터 페이터 모음집, 옥스퍼드 출간 Collected Works of Walter Pater, 2019) 사실 이 말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를 살다 간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인용하여 ‘페이터’가 좀 더 쉽게 풀어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견해는 사실 음악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실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지닌 여러 추상적 성질에 관심을 두었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견해는 Beethoven음악의 평가를 통해 분명해지는데 “베토벤의 교향곡은 겉으로는 혼란스럽지만 그 밑바닥에는 놀라운 균형이 깔려 있다. 그의 교향곡은 얼마 가지 않아 아름다운 조화로 끝을 맺는 치열한 난투를 드러내고 있으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물들이 생멸하고 끊임없이 공간을 넘나드는 세계의 본질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그의 교향곡은 인간의 모든 감정과 격정,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절망과 희망을 미묘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영혼이 충만한 하늘나라에 있는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전종호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각 시편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위 ‘쇼펜하우어’가 베토벤 음악에서 느꼈던 음악적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음악에서 느끼지 못했던 더 명징하고 분명한 선생님의 우렁차고 깊은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2.     無言의 대화


시인의 빛나는 감성의 징표徵表들이 활자화되면서 종이 위 활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활자 밖으로 터져 나오기 위해서는 시인은 자신의 시어詩語들을 끝없이 정련精鍊하고 또 정련한다. 물론 독자에게도 시를 읽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는 필수 요건이다. 그리하여 그 시어를 부려 시를 쓴 시인과 그 시어를, 시를 읽는 독자는 한 개의 시어로, 혹은 시 한 편으로 시인이 생각했던 것, 갔던 곳,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전적으로 공명共鳴하게 된다. ‘오대산에 가면’을 읽으며 나는 전종호 선생님과 함께 그 새벽 전나무 숲길을 걸었고, 선재길 물소리를 함께 들으며 걷고 있었다.


오대산에 가면 새벽 일찍 일어나

전나무숲길을 걸을 일이다.

숲에서는 절대 키와 나이는 재지 말고

숲길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

오대산에서는 오로지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소리의 진언眞言에 무릎을 꿇고

오대천 물소리 한 바가지 떠안고 돌아올 일이다.

<오대산에 가면> 일부


3.     영적 공간의 공유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시인에게는 늘 특별하다. 선생님의 시집을 읽다 보면 곳곳에 깊고 넓게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을 발견한다. 그 공간은 선생님의 영적 공간이다. 이미 활자화된 시집에서부터 장래에 쏟아져 나올 심령의 모든 근원이 거기에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道, 沖 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도, 충 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아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다. 깊은 연못이구나! 마치 모든 것의 근본인 것처럼. <도덕경 4장 일부>


그 공간은 연못일 수도 있고, 혹은 심원한 계곡일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인의 영감에 의해 그 공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베리아 자작나무숲이 동사형이었다면

원대리 숲은 수려하고 세밀한 형용사였다.

<자작나무 숲에서> 일부


‘동사’와 ‘형용사’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단어가 시인에 의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알 수 있다. 그 영적 공간에서 시인의 영감이 투사된 ‘동사’와 ‘형용사’는 이제 거대한 Image로 변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결국 시인이 가졌던 영적 공간 속에 불현듯 가 있게 되는 것은 어쩌면 전종호 선생님의 영적 깊이에 완전히 의존하였을 것이다. 


4.     거대한 통찰


『장자』 ‘칙양’에 이르기를 ‘覩道之人 不隨其所廢 不原其所起(도도지인 불수기소폐 불원기소기)’ 道를 통찰(覩도)하는 사람은 만물이 사라지는 이 세상 밖의 것을 따르지도 않고, 만물이 생성해 나오는 기원을 탐구하지도 않는다.


즉 통찰洞察(Insight)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능력이다. 잡다한 인식이나 구차한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시각으로 사물의 본성에 다가가는 것이 통찰일 것인데 선생님의 시집 곳곳에서 통찰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봄이 오고

연두 새싹 자라나 초록의 수풀 너머

짙푸른 잎 철들어 갈 빛이 될 때쯤

사람 머리에도 눈 발이 날리는 줄 알았다.

<불가사의> 일부


통찰의 경지를 넘어서면 통효通曉가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새벽처럼 환해진다. 아름다움이나 추함, 생성과 소멸에서 조금 물러나 사물이 되어가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면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희망이, 그리고 우리의 절망이 뻗치지 않는 그 절대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거듭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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