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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an 11. 2024

정치판

정치판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는 장을 말할 때 우리는 ‘정치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판’의 속뜻에는 싸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왜 싸우는가? 당연히 권력 때문이다. 권력의 속성은 절대 양분될 수 없고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정치판은 살풍경하고 피아의 구분이 없다. 따라서 언제나 속이고 배신하며 또 연대하기도 하는 이율배반과 음모가 그 속에 있다. 이런 상황을 저들끼리 표현하는 말이 있으니 “정치는 생물이다!” 참 놀고 있다! 웃다가 웃다가 배를 잡고 죽을 일이다.


그런가 하면 정치의 대상인 보통 사람들은 정치가들보다는 덜 배신하고 덜 이율배반적인 삶을 산다. 왜냐 하면 보통의 우리에겐 싸워서 가져야 할 권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거대한 음모 따위도 없다. 음모가 없는 우리가 정치판의 음모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무서움 혹은 서글픔이다. 그 서글픔은 우리의 처지에 대한 자조적인 슬픔을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의 서글픔까지 포함된 약간은 복잡한 것이고, 무서움 또한 어두워서 불쾌한 느낌, 즉 불확실성과 불투명함에서 오는 무서움이다.


권력의 내부적 속성은 이익의 독점에 있다. 즉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가질 수 이익의 수호를 위해 그들은 권력에 복종하고 권력을 유지하려 든다. 사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이 권력의 이익을 누려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 맛도 느낌도 전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 집권여당의 그 많은 국회의원, 정치인, 관료들이 멍청하고 무식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어쩌면 친일인지 친미인지 모르고 또, 진보와 보수를 구분 못하겠는가? 아니다. 그들도 안다. 그들이 청소년 시절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이었는가? 공부는 정말 잘했고 품행도 방정했으며 모든 이의 모범이 된 그들이 아닌가?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받았던 상장에는 아마도 분명 그렇게 적혀 있다.) 따라서 추정컨대 그들도 그들끼리 모이는 어두운 밀실에서는 미국과 일본에게 분노하며 또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고 자신이 받들어 모시는 지도자를 까며 현실상황을 개탄할지도 모른다. 


단지 그들이 당당하게 반대, 혹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끔은 목에 힘주어 적극적 홍보를 하는 것도) 것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누리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완벽하게 보장될, 권력이 확실히 담보하는 그 이익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그런 예를 수 없이 봐왔고 권력의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그들은 그 좋은 머리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고 욕하고 분노하고 또는 안타까워하는 우리가 그들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은가? 비록 우리에게는 그 어떤 담보된 이익도 없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자신의 양심을 완벽히 속이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가면조차도 속이는 저들, 정치판의 존재들보다는 최소한 인간적 행복을 누리지 않는가?


21대 국회가 저물어 간다. 그 사이 우리는 수많은 입법과 정치적 행위들을 그들에게 기대했다. 그런데 그들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저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저들의 이익을 위해 판을 짜고 세력을 규합하고 은밀하게 내통하는 형국이다. 국민들을 들러리로 전락시킬 속셈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권력의 속성인지도 모르겠지만 22대 국회의 모습은 이전 시기의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데 내 손 목을 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지금의 정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의 마음속에 그저 그런, 뻔한 거짓과 위선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이해될 까 두렵다. 명징하고 아름다우며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상도 분명히 있는데 …… 


표지는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불쌍한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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