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Feb 13. 2024

소크라테스의 점토 비유

소크라테스의 점토 비유 


소크라테스는 지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점토’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점토’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이 질문에 옹기장이들의 ‘점토’와 화덕장이들의 ‘점토’, 그리고 벽돌장이들의 ‘점토’ 각각의 것이 ‘점토’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점토’ 자체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쓰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네.(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옮김, 이카넷, 2022. 39쪽) 


그러면 ‘점토’는 과연 무엇인가?


속성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점토’의 속성, 예를 들어 점토 각 입자의 크기를 이야기하고 성분은 무엇이며 다른 종류와 구별 기준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것이 점토의 설명일까?


소크라테스는 이 지점에서 분위기를 바꾼다. 


즉, “우리가 점토를 언급할 때면, '조각가들의'라는 말을 덧붙여 대답하든, 그 밖의 다른 '어떤 장인들의'라는 말을 덧붙여 대답하든 간에, 질문을 던진 쪽이 우리 쪽의 대답을 통해 이해한다고 우리가 여기고 있기 때문이네. 아니면 자네(테아이테토스)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어떤 이름을 누군가가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나?”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옮김, 이카넷, 2022. 40쪽)라고 말한다. 


마지막 부분의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어떤 이름을 누군가가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나?”는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 


다른 말로 바꾸면 어떤 것의 '무엇임'을 알지 못하면, 그 어떤 것에 대한 이름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즉 ‘점토’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점토’라는 용어조차 쓸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점토’라는 용어를 쓰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알고 쓴다는 의미인데, 역시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점토’라고 쓰는 순간 이미 우리는 ‘점토’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이 플라톤이니 플라톤은 아마도 이렇게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누가 보아도 오류다.)  


이 이론은 '기치'(Peter Geach, 1916~2013)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등에 의해 비판받는다. 그 비판의 요지는 이러하다. 


위에서 말한 “‘점토’라는 용어를 쓰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알고 쓴다는 의미”를 우리는 ‘정의적 앎’이라고 부르자. 플라톤의 논지는 ‘정의적 앎’이 없으면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매우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의 '무엇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의 이름을 사용할 경우, 그 사용은 그 낱말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고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정도를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강의 노트를 편집한 책 『‘철학적 조사"를 위한 예비 연구(Preliminary Studies for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흔히 알려진 이름 『청색, 갈색 책』 Blackwell Publishers Ltd. 1958. 내용 참조) 


정리하자면 소크라테스가 ‘점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각각의 장인들의 예를 인용한 것은, 그 각각의 장인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점토’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그들의 견해를 인용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각가는 조각가가 필요한 만큼 충분하게 ‘점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조각가의 ‘점토’ 설명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그 설명을 조각가가 아닌 우리가 했을 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마치 ‘점토’를 알고 있는 것처럼 오인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앎’이란 대단히 미묘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소크라테스는 ‘점토’를 이렇게 정의해 버린다.


‘점토’는 누구의 것인가를 제쳐두고 “물로 반죽된 흙이다.”라고 평범하고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옮김, 이카넷, 2022. 41쪽)


어쩌면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우리와 같은 지점에서 스스로 논리적 오류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테아이테토스를 해석하면서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지역이나 학문의 변방에 있는 나의 어리석은 추측일 뿐.    


표지 그림은 아방가르드의 대표자이며 '다다'의 정신에 충실한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프랑스 출신의 Francis Picabia의 Optophone(옵토폰)이다. 72x60 크기이며 1921년 작이다. 옵토폰은 시각 장애인이 사용하는 장치로 텍스트를 스캔하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톤 코드를 생성하여 글자를 식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Gettier proble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