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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r 15. 2024

인식론을 위한 워밍업(16)

『장자』의 ‘인식론’

『장자』의 ‘인식론’


1.     인식의 평가는 완전하지 않다.


‘장자’ 인식론의 핵심 방향은 대상보다는 대상을 수용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이를테면 ‘내가 알고 있다’는 상황을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을까?’로 바꾼다. 거기서 다시 그 상황, 즉 알게 된 상황을 파악하게 된 원인이나 과정을 유추하려 한다. 이를테면 인식의 과정을 계속 이어지는 양파껍질과 유사한 얼개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과정을 보여 주는 내용이 『장자』 ‘제물론’에 있다.  


“지금 여기에 어떤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진리와 유사한지, 또는 진리와 유사하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진리와) 유사한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을 서로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면 진리 아닌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시험 삼아 한 번 말해 보고자 한다.”


“처음이라는 말이 있으며, (1단계)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며, (2단계) 처음에 ‘처음에 처음이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도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3단계)


“有라는 말이 있고, 無라는 말이 있으며, (1단계) 처음에 ‘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며, (2단계) 처음에 ‘처음에 無라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직 있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3단계)


이와 같은 문자적 표현이 생겨나자, “이윽고 無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알지 못하겠다. 有와 無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 것인지를! 이제 내가 이미 말함이 있는데 아직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연 말함이 없는 것인가?”


대단히 치밀하게 계획된 논리적 점층이다. ‘장자’ 인식론의 특징은 인식의 ‘본질’과 ‘과정’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데 있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인식을 인식 대상물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버리고, 오히려 인식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인식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인식의 과정은 불완전한 상태이거나 혹은 불완전하므로 그것을 인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자’는,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인식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장자』를 읽으며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데 일부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     인식으로 무엇인가를 획득할 수는 없다.


『장자』 '지북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순舜임금이 뒤에서 보필하는 승丞에게 물었다. “도를 가질 수 있는가?”


승丞이 말했다. “왕의 몸도 온전히 왕의 차지가 아닌데 왕께서 어찌 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뚱이가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 것이란 말이오?”


승이 말했다. “그것은 천지자연이 모습을 맡긴 것입니다. 삶은 왕의 것이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조화로움을 맡긴 것이며, 성명性命이 왕의 것이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순조로움을 맡긴 것이며 자손들이 왕의 것이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허물을 맡긴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길을 갈 때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며 머물 때에도 무엇을 지켜야 할지 알 수 없으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는지라 천지자연의 강건한 양기가 작용한 것이니 또 어찌 내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적인 표현이라 인식의 이야기와 언뜻 연결이 어렵지만 조금만 확장시켜 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들린다. 예를 들어 ‘도’를 인식이라고 가정해 보면 인식은 어떤 방식으로든 획득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획득될 수 없다는 것과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순 임금은 ‘도’를 파악한 상태라는 것을 그의 질문으로 알 수 있다. 즉 도가 이러한데(파악했는데) 그것을 내가 획득할 수 있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승은 그것은 단지 파악될 뿐, 획득하기는 어렵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장자』 '지북유'에 또 다른 예가 있다.


등장인물은 태청泰淸(완벽하게 푸르다. 즉 매우 순수 혹은 단순하다), 무궁無窮(다함이 없지만 그것이 전부다), 무위無爲(쓸모없음의 쓸모를 안다.), 무시無始(시작과 끝이 없으니 도에 가장 근접한 존재다.) 넷이다. 결론 부분을 당연히 무시가 답한다.


無始가 말했다.


“도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들을 수 있다면 도가 아니며 도는 볼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볼 수 있다면 도가 아니며 도는 말할 수 없으니 말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드러난 모습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無始가 말했다.


“도를 물었을 때 대답하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하는 자이니 비록 도에 관해 묻더라도 도가 무엇인지 들을 수 없다. 도는 물을 수 없는 것이며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을 수 없는 것인데 물으니 이것은 물음이 다한 것이다. 대답할 수 없는데 대답한다면 이것은 도가 안에 없는 것이다.”


불교적 무와 근접해 있지만 불교적 무의 본질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불교적 무를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는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없음’이 없이는 ‘무위’도 없고 참된 존재도 없다. 참 존재는 ‘없는 상태’에서 나온다. ‘없음’이야말로 항상 거기에서 모든 것을 나타낸다. ‘진공묘유’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을 보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보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장작에서 재를 보고, 재에서 장작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해 작용되고 동시에 현상으로 작용한다.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완전한 ‘공’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만물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이다. ‘공’의 그러한 형성 및 작용을 ‘진공묘유’라 한다. 의미로만 본다면, ‘진공은 적적寂寂이며, 묘유는 성성惺惺’이 된다.


하지만 장자의 인식론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즉 인식의 본질을 우회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오히려 본질이 흐려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어찌 되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이미 서양식의 사고 체계, 이를테면 ‘게티어 문제’처럼 논리 값으로 정해진 상황에 익숙해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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