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處發不能稱花乎!(하처발불능칭화호!)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堇菜堇紫色 (근채근자색) 보라색 제비꽃
途上隙孔發 (도상극공발) 도로 위 틈새에 폈네.
無生本無氣*(무생본무기) 본시 삶도 기도 없지만,
芒芴暫有華 (망홀잠유화) 뒤섞여 잠시 빛나고 있네.
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오후. 차들도 사람도 다니는 길 사이 핀 제비꽃을 보다. 자동차 바퀴에, 사람 발에 금방이라도 짓이겨질 운명이지만 온 기운을 다 모아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비록 잘 꾸민 화단도 한적한 산 길도 아닌 번잡한 곳에 잠시 형체를 드러냈지만 이 꽃이, 꽃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문득 ‘문부식’의 시가 생각났다. 어디 핀들/꽃이 아니랴/감옥 안에 핀다고/한탄하지 않고/갇힌 자들과 함께/너희들 환한 얼굴로 하루를 여나니/간혹/담을 넘어 들어오는 소식들은 밝고/짐승처럼 갇혀도/우리들 아직 인간으로 남아/오늘 하루 웃으면서 견딜 수 있음을……(‘문부식’ ‘꽃들’ 일부)
지난 1990년, 한겨레 신문 주관으로 열린 겨레의 노래(김민기 총감독)에서 ‘임준철’ 작곡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당시 내 처지에 너무나 잘 맞는 노래였다. 34년 전 이야기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 『莊子』 ‘지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莊子의 아내가 죽어서 惠子가 조문하러 갔더니 장자는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혜자가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식까지 키우고 함께 늙도록 年輪을 쌓다가 바로 그 아내가 죽었는데도 곡을 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괜찮으나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처음에 아내가 죽었을 때에 난들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만, 그 삶의 처음을 살펴보았더니 본래 삶이 없었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形體도 없었고,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氣조차 없었다.(중략)
저 사람이 천지의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데 내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사람들의 習俗을 따라 울어대는 것은 스스로 天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에 그만두었다.”
그 이야기에서 용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