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추석, 더위, 그리고 막막하고 답답한 세상.
1. 추석 연휴를 시작하며
지난 해만 해도 추석 연휴 날씨가 이 정도는 아니어서 14층에 있는 우리 집 창문을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따라 더러 아래층 사람들의 소리와 음식 장만하는 냄새도 올라와서 매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2024년 올해 추석은 지금 밖에 온도가 31도를 넘고 있고 체감은 37도를 육박하니 …… 며칠 전까지는 짜증이 났지만 이제는 살짝 두렵기까지 하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정확한 현실이다.
기후만 그런가! …… 더 이상 말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이 날씨보다 더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래도 추석이라고 고향으로 가고 또 누군가를 만나는 우리 민족이 참으로 대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젊은 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은 단절이다. 회복할 수 없는 절대의 경계를 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경계 이 쪽에 살아있는 우리에게 잔존하는 부실한 관계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절대적인 시간에 의해 아주 쉽게 그리고 아주 고요하게 잊힐 것이다.
2. 몇 개의 연결되는 생각
오래전 읽은 고전소설의 제목을 듣고 그 소설의 내용 중 아주 작은 조각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프랑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니 (동질감에) 문득 의외의 기쁨이 있다. 그러다가 이즈음 새벽길에 무수히 다가오는 안개, 그 작은 물 알갱이들을 보며 내 기억의 터널도 저 안개처럼 세월의 알갱이에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과, 이제 그 흐려진 기억의 터널에 널브러져 있다가 마침내 완전히 잊힐 나의 기억들이 돌연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안개는 비가 아니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 비처럼 도로를 적시고 빈 나무 가지를 적셔 물방울이 생기고 그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비와 안개가 무슨 차이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에 빠져든다. 경계를 이루는 것에 대한 나의 집착과 고정관념이 이 작은 자연현상에서조차 이렇듯 불분명해지는 것을 보면 나의 앎이란 얼마나 형편없는가!
그렇다고 내가 고매한 인품을 가진, 그리고 세계를 관통하는 현자가 아닌 이상 현자처럼 고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매일을 산다는 것은 나 아닌 모든 이에게 위험한 일이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나의 삶은 내 몸을 위한 과정의 연속이다. 나는 내 몸을 먹일 것과, 쉬게 할 곳과, 입혀야 할 것을 준비하기 위해 일생을 노력하고 좀 더 나은 그 모든 것을 위해 나를 포함한,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이들을 누르고 또는 상처 주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이런 나를 방치하는 것이니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러니 최소한은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좀 더 나아가 그 최소한의 기준은 무엇인가? 모른다? 아니 없다? 기준을 흔드니 모든 가치가 흔들린다. 교사인 나는 40년 가까이 이 기준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해 왔다. 그런데 막상 그 기준이 모호해진다.
무지하게 복잡해지는 오전이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