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Oct 02. 2024

정신을 가다듬고

1. 정신을 가다듬고


지난 몇 주 동안 『존재와 시간』을 탐독하면서 자괴감과 분열증, 그리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 오후 문득 너무 깊이 빠져들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거시적 통찰을 위해 멀찌감치 떨어지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잠시 깊은 하이데거로부터 빠져 나왔다.


독일어로 된 이 책을 독일 사람들조차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정도로 난해한 언어의 사용이 이 책의 특징이다. 하물며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또 얼마나 문장이 꼬이고 뒤집혔을까? 그러니 난해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조차 그런 일을 예감했는지 1927년 판 『존재와 시간』에 플라톤의 이런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있다.


"당신들은 분명히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들이 '존재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 표현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도 전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은 곤혹스러움에 빠져 있다."


일상의 언어였던 ‘존재’라는 말이 문득 광야처럼 우주처럼 난해해지는 깊고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존재한다', '존재하는', '존재'라는 표현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 “책이 존재한다.” 등으로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곧잘 의심 없이 사용해 왔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을 펴는 순간 거대한 혼란에 직면하고 만다. 다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이라는 낱말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해하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선 무엇보다도 다시금 이 물음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낱말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기왕에 가졌던 지성이나 인식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혼돈에 빠지고 만다. 알고 있던 것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주했을 때 오는 당혹감이란……


2. 지평을 열어젖히며


중학교 철학 2와 3을 쓰면서 나는,


헤겔과 칸트에 좌절했고 그 이전에 스피노자에게 좌절했으며 또 그 이전에 장자, 노자와 마주하며 좌절했다. 내가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지만 나는 그들에게 매달렸고 희미하게나마 그들이 남겨놓은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책에 옮겨 놓았다. 


부처 이야기는 어떤가? 14살 무렵 처음 불경(화엄경법성게)을 읽었을 때는 잘 이해가 되는 듯했으나 20세 때는 좀 더 어려워졌고 3, 40대는 더 난해해지고 6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난해 한 것을 보면 갈수록 아둔해져 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범위에서 이해하고 그만큼 나누기 위해 나는 이해한 만큼 글을 쓸 것이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 낼 것이다. 이 정도만 이해해도 충분하다가 아니라 이 정도 이해로부터 더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 내 책의 목표다. 


내일 하루는 어려운 텍스트에서 나를 쉬게 할 예정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