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15)
주변 세계의 주변성과 현존재의 공간성
『존재와 시간』 1부의 표제는 매우 길다.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인 지평으로 설명함’(Die Interpretation des Daseins auf die Zeitlichkeit und die Explikation der Zeit als des transzendentalen Horizontes der Frage nach dem Sein)이다. 시간과 현존재의 관계를 규명하려 했던 하이데거에게 ‘공간’ 역시 ‘시간’만큼 중요한 것으로써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개념이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용적 존재자는 사물로서 당연히 공간 속에 있다.(당연히 현존재적 세계에도 공간은 존재한다.) 여기서 공간은 환경세계이다. 즉 현존재인 우리에 의해 관찰되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말한다. 그 환경세계에서 만나는 가용적 존재자 대부분은 도구이다. 도구는 적소성[1]이 있어야 한다. 도구의 적소성이란 도구가 놓여있는 방향이 사용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예를 들어 가위라면 그 가위가 무언가를 자를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위치가 가위를 마주하는 현존재에게 즉시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치는 우리에게 측정될 수 있는 위치(즉 동, 서, 남, 북)가 아니라 본질적인 위치를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 위치에 대해 매우 정교하게 설명한다. 먼저 하이데거가 위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거리 없앰’과 ‘방향잡음’ (ein ent-fernend-ausrichtendes)[2]이다. 거리 없앰에서 거리는 일상적인 멀고 가까움은 아니다. 이를테면 기분이 좋고 몸이 상쾌할 때 길을 걸을 때는 그 거리가 매우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힘들고 멀게만 느껴진다. 결국 여기서의 거리는 현존재의 일상에 대한 배려[3]로부터 파악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거리 없앰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공간적이기 때문에, 교섭은 언제나 어떤 활동 범위 안에서 그때마다 현존재에 의해 거리 없앰으로 환경세계 내에서 행해지며, 따라서 우리는 거리상으로는 우선 가장 가까운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넘기는 수가 흔히 있다. 시각과 청각은 원거리 감각이지만, 그것은 이 두 감각이 사정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니라, 현존재가 거리 없앰 하는 자로서 주로 이 두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현존재의 공간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현존재의) 육신의 눈으로 파악되는 가용적 존재자(도구) 혹은 관념적 여겨짐(vorkommen-앞서 이야기한 거리 등)[5]은 현존재가 그 위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용적 존재자(도구) 혹은 관념적 여겨짐은 본래 그 자리에 있을 뿐(자리를 차지하고)인데 현존재는 그 사실을 세계-내-존재로 파악함과 동시에 일종의 거리 없앰 속에서 머물려한다. 하지만 그 거리 없앰은 일정한 거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분명한 조건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기서 또 하나의 개념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Gegend’[6]이다. Gegend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은 이러하다.
“(도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때마다 하나의 도구가 귀속하는 특정한 ‘저기’이고 ‘거기’이다. 그때그때의 도구의 귀속성은 가용적 존재자인 도구의 성격에 상응한다. 다시 말하면 가용적 존재자가 도구 전체에 적소적으로 귀속하는 것과 상응한다. 그러나 도구 전체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귀속성의 근거에는, 그 귀속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어디로' 놓여 있고, 이 '어디로'를 향해서 하나의 도구 연관에 자리 전체가 지정된다. 배려적 교섭 속에서 배시적[7]으로 앞질러 주목되는 이 '어디로', 즉 가능한 도구적 귀속의 '어디로'를 우리는 방역이라 한다.”[8]
아주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요약하면 방역이란 도구가 있는 제자리 주변부(그 도구의 영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만큼), 그리고 그 주변부의 공간성을 의미한다.
방향 잡음(ausrichtend) 역시 세계-내-존재의 중요한 존재 양상이다. 방향 잡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은 이러하다.
“매우 익숙하지만 캄캄한 어떤 방 안에 들어선다고 가정하자. 내가 없는 사이에 물건을 치워 오른쪽에 있던 것이 이제는 전부 왼쪽에 있다고 가정하자. 내가 방향을 잡으려고 하는 데에 나의 양 측면이라는 '구별에 대한 느낌'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 파악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데, 이 대상에 대해서 칸트는 '그것의 위치를 내가 기억하고 있는'[9]이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나는 필연적으로 잘 알려진 세계 곁에 그때마다 이미 있음 안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방향을 잡는다.'”
즉 현존재는 대상(공간)과의 교섭으로 말미암아 이미 정해진 위치와 상황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교섭을 시도하고 그것은 칸트가 말하는 경험적 직관(공간 및 시간에 대한 칸트의 견해)의 형식으로 현존재에게 수용되는 것을 방향 잡음이며 그것은 언제나 현존재의 의도대로 열려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 가용적 존재들, 이를테면 ‘도구’들은 반드시 지시에 의해 그 가치가 부여된다. 공간 내부에서 적합한 자리, 적합한 지시로 존재하는 것이 가용적 존재인 것이다. 당연히 전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성질을 적소성(適所性=Bewandtnis 영 Context. ‘사정’이나 ‘정황’)
[2] SZ 11 판, 1967. 110쪽,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까치, 2020. 148쪽
[3] 여기서 배려는 현존재와 대상의 교섭을 말한다.
[4] SZ 11 판, 1967. 107쪽.
[5] SZ 11판, 1967. 106쪽. ~처럼 보이는, 혹은 ~처럼 인식되는.
[6] Gegend의 본래 의미는 지방, 지역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 용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주변부, 혹은 (도구)의 근방 정도의 의미인데 소광희는 이 용어를 방역方域으로 번역한다.
[7] 현존재와 가용적 존재자의 상호관계. 배시라는 말은 그런 관계에 기초하여 관찰되는,
[8] SZ 11판, 1967. 108쪽.
[9] 순수이성비판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24, 42쪽.(공간,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과 초월적 관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