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16)
- 더불어 있음과 자기 자신으로 있음의 세계-내-존재. ‘사람들’ (Das In-der-Welt-sein als Mit-und Selbstsein. ‘Das Man’)[1]
나 자신은 세계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모두는 세계-내-존재로서 현사실적으로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어떤 존재자인가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둘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즉 ‘더불어 있음’과 ‘함께 거기에 있음’(Mitsein und Mitdasein)[2]이다. ‘더불어 있음’은 나의 현존재와 같은 구조를 가진 일반적인 존재들과의 존재양식이고, ‘함께 거기에 있음’은 일상성(alltägliche) 속에 살고 있는 세계-내-존재인 나와 다른 ‘사람들(Das Man)’의 존재 방식이다.
여기서 ‘사람들’로 표현되는 존재들은 세계로부터 이해되는 ‘나’, 그리고 ‘타인’을 말하는데, 그 사람들의 다양한 존재양식 중 하나가 평균적인 일상의 삶 속에 있는 ‘나’와 ‘타자’의 존재형식인 것이다.
그러면 현존재는 누구인가? 당연히 ‘나’다. ‘나’는 가용적 존재자와 전재자((Vorhanden sein: 이미 불변적으로 존재해 있는 환경 세계) 사이에 있으며 세계를 향해 주체(subjetum)로서 ‘나’로 간주되는 현존재이다. ‘나’는 비록 실체이기는 하지만 이미 ‘주어진 것’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세계성은 희박해지고 동시에 전재자, 혹은 일반적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러한 ‘나’는 관념적, 추상적 자아일 뿐, 일상성 속에서 실존하는 ‘나’와 멀어질 수 있다.
이러한 ‘나’에 대한 설정은 후설[3]이 말하는 ‘생각하는 자아(ego cogito)’[4]와 비슷하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성이 기초되지 않는 단순한 주관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동시에 파악될 수도 없다고 전제한다. 좀 더 범위를 좁히면 타자 없이 완전하게 독립된 자아도 확인될 수 없다. 이를테면 ‘자아’가 현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그 규정은 완전히 실존론적, 즉 실존하는 자로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의 존재 자체는 실존에 의해서만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타자’는 누구인가? 현존재인 ‘나’와 마찬가지로 가용적 존재자, 그리고 불변적으로 있어온 전재자와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현존재가 타자이다. 즉 그도 ‘나’와 같은 세계 안의 존재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타자를 공동현존재(Mitdasei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한다.
“타자란 그들로부터 자아가 부각되는 나 이외의 나머지 전부가 아니다. 타자들은 사람들이 대체로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 속에 섞여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5]
타자란 나와 함께 공동의 세계(Mitweld)를 이루고 있으면서 그 속에 함께 살고 있는 공동현존재이다. 알고 있는 것처럼 현존재가 있는 세계는 분명히 공동 세계가 틀림없다. 거기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공동 존재(Mitsein)로써 세계-내-존재의 구성요소들이다. 공동현존재는 이와 같은 환경 세계 속에서 현존재와 만나는 유일한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유일하다는 것은 타자들은 당연히 가용적 존재자(도구)가 아니며 (비록 인식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불변하는 전재자도 아니며 동시에 그것에 기초한 주관도 아니다.
현존재는 세계성에 따라(개입되어) 가용적 존재자와 전재자와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에 따라 주고받는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타자를 만나게 된다. [6]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예를 들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공동세계 속에서 연필은 쓰는 것을 연상하게 되고 음식은 먹는 것을 떠 올리며 시계는 시간의 흐름, 즉 과거와 현재를 연상하는 것과 같다.
그러고 보니 타자의 공동 현존재는 세계 내부에서 가용적 존재자를 통해 현존재와 만날 수 있게 된다. 정확하게는 만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타자에 대하여 존재론[7]적 탐구는 제한한다. 그 이유는 타자를 존재론으로 해석할 경우 가용적 존재자에 대한 그리고 전재자에 대한 현존재에 의한 감정이입(Einfürung)[8]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 (das man)
‘사람들’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현존재들이다. 이들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도 아니며 동시에 몇몇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의 총체도 아니다. 그들은 매우 중성적 [9]이다. 즉 현존재의 중성적 실존 방식이 곧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평균적 일상성을 영위한다. 그들은 모두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니다. (Jederman und Niemand)[10]이를테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중이다. 그 대중들 속에 당연히 ‘나’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완전히 타자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많은 군중들(그 한 명 한 명의 현존재들)은 타자라는 존재양식에 완전히 스며들어 [11] 있다. 즉 현존재들 각자의 차이들이 대중이라는 존재 양식에 의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중과 타자는 미세한 차이를 가지게 된다.
결국 ‘사람들’이란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현존재들, 즉 ‘나’와 ‘타자’들이다. 사람들은 앞서 밝힌 것처럼 가용적 존재자들과 교섭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이해하며 세계가 우리를 보는(세계를 주체로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 즉 ‘나’와 ‘타자’들을 관찰할 때 - 피해석성 Verstehen [12])데 따라 자기를 보고 자기를 해석하며, 그런 자신을 선택하게 된다. 여기서 ‘일상성의 평균화’[13]라는 개념도 성립된다.
하이데거의 ‘사람들’에 대한 서술은 하이데거 당시의 사회(이미 대중 사회로 변모한)에 대한 분석으로써 ‘사람들’의 실존론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였다. [14] 즉 ‘자주성’, ‘평균성’, ‘공공성’, ‘통합성’, ‘존재면책’, ‘영합’을 들었다.(Abständigkeit, Durchschnittlichkeit, Öffentlichkeit, Einebnung, , Seinsentlastung und Entgegenkommen) [15]
[1] 이기상 번역에 따름. 소광희는 ‘공동 존재와 자기 존재’: <세인>으로 번역함.
[2] SZ 11 판, 1967. 114쪽.
[3]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년~ 1938년)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이다. 하이데거의 스승.
[4] 후설의 ‘생각하는 자아’란 ‘사유하는 나의 존재’. 다시 말해 사유의 주체로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무엇’에 대해 사유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능동성을 결코 잃지 않는 주체를 말한다. 즉 어떤 대상을 지향하고 그것을 마침내 현상으로서 구성해 내는 ‘지향적 구성능력’ 자체가 바로 코기토(사고思考, 생각)이다. 이 경우 세계의 현존은 신의 보증이 필요하지 않다. 대상을 그 자체로서 현상으로 구성해 내는 능력이 바로 코기토의 본질이다.
[5] SZ 11판, 1967. 118쪽.
[6] 위의 책 같은 곳.
[7] 존재론: 존재론은 무엇이 진실이며 실재인가, 현실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학문으로써 물질적인 세계 넘어서의 어떤 것을 다루는 학문을 말하는데 하이데거는 비 물질적인 세계로 이 논의가 확산되지 않기 위해 존재론적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의 논리(인정투쟁-중학교 철학 2, 김준식 지음, 교육과학사, 2023. 125쪽 이하 참조)나 그의 스승이었던 후설의 타자 구성을 위한 상호주관성(Intersubjektivität)을 배제한다
[8] 감정이입: 공동 존재를 근거로 하여 설명 가능한 부분. 하이데거가 감정이입 등의 문제를 꺼린 것은 감정이입 등은 의식의 문제를 끌어와야 되고 동시에 공동현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미 의식으로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는 타자를 완전하게 해체하여 현실적으로 확인 가능한 타자로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9] 여기서 중성적이라는 말은 구체적 속성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10] 위의 책 128쪽. 모두(총체)라고 하면 중성적 실존 방식을 위협하고, 아무도 아니라고 한다면 일상성에 기초한 실존 전체가 모순이 된다.
[11] 하이데거는 용해(Auflösung)라고 표현한다. 위의 책 131쪽.
[12] 위의 책 128쪽.
[13] 일상성의 평균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독자성이 지속적으로 사회 속으로 내 던져지면서 차이가 소멸되어 마침내 거시적으로 비슷해 보이는 일상의 삶을 말한다. 위의 책, 181쪽.
[14] 위의 책 128쪽
[15]『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저, 소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22. 88쪽 참조
그림은 Self Portrait with Physalis(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