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19)
- 이해로서의 현-존재
‘현-존재(Das Da-sein)’라고 표현된 것과 ‘현존재(Dasein)’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과 존재 사이에 하이픈(-)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우리말로 해석할 때 약간의 차이를 둔다.[1]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이해(독 Verstehen, 영 understanding, comprehension)’이다.
‘이해’는 『존재와 시간』 전체에 걸쳐 제시되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서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즉 ‘처해 있음’(‘정상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함)을 바탕으로 하여 같은 거리(멀고 가까운) 안에 위치하는 현존재가 외부를 향해 열려있음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해는 세계-내-존재를 근본적으로 열어 밝힐 수 있는 핵심이다.[2]
예를 들어 ‘어떤 것을 이해한다.(etwas verstehen)’는 표현은 ‘어떤 일을 주관(맡아서 처리)할 수 있다.’(einer Sache vorstehen können) 또는 ‘누구에 못지않은 능력이 있다.’ ‘누구와 비교해서 빠짐이 없다.(ihr gewachsen sein), ‘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다.’ 나아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다.’(etwas können)의 뜻으로 사용된다.[3]
예를 들어 우리가 ‘휴대폰을 이해한다’라고 하면 휴대폰을 사용하고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해’가 ‘실존범주’[4]내에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이해를 굳이 ‘실존범주’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해’ 자체가 현존재의 매우 중요한 존재 양식의 하나라는 말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설명한다. “실존범주로서의 ‘이해’는 ‘무엇’(독 Was, 영 What)이 아니라 실존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이다. ‘이해’에는 (실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이라는 현존재의 존재 양식이 놓여 있다.”[5]
종합해 본다면 이해는 실존하는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이다. 즉 실존범주로서의 가능성이 바로 현존재의 실존 가능성이다. 인간은 어쨌든 이 세상에 태어났다.(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즉 피투- Geworfenheit)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다.(현사실성- Wirklichkeit) 그런 인간들의 공통된 특징은 가능성을 향한다는 것이다. 가능성이란 미래 지향성(투사- Entwurf)을 포함한다. 이러한 인간의 특징을 우리는 기투(Entwerfen)[6]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투에 대하여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자신을 기투했고 또 기투하면서 존재한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가능성에 입각하여 자신을 기투한다.”[7] 여기서 현존재의 존재 성격을 완전한 ‘자유’로 볼 것인가에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현존재의 실존가능성의 배경 중 하나가 자유라면 그 자유는(완전하지 않고 심지어) 일정한 제한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현존재가 비록 (자유를 기반으로 한)기투적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현존재는 여전히 철저하게 피투적 가능성일 뿐이다.[8]
- 이해와 해석(Auslegung)
일반적으로는 해석을 통해 이해가 심화된다. 즉 해석이 선행하면 이해가 따라온다고 보는데 하이데거는 좀 더 나아가 해석이 선행했을 때 이해는 완성된다고 보았다. 즉 해석은 이해의 충분조건이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해의 기투[9]는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해의 이러한 형성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이름한다.”[10]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은 해석이라는 작용을 바탕으로 이해의 기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해석에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해석에서 이해는 어떤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자체가 된다. 해석은 실존론적으로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해가 필연적으로 해석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석은 이해된 것을 알게 됨이 아니라 이해에서 기투된 가능성들을 정리 작업함이다.”[11] 이를테면 해석은 이해의 완성인 셈이다.
해석이란 사전적으로 펼쳐놓은 것을 의미한다. 독일어 ‘Auslegung’의 본래 뜻이 ‘펼침’이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혹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은, 각 부분의 해체(펼침)를 통해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수용하는 조심스러운 접근을 말한다.[12]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내가 가용적 존재자들이 적합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 때(적소성) 어떤 도구를 송곳으로 이해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이해를 ‘송곳은 종이나 기타 얇은 소재의 구멍을 뚫는데 필요한 도구로서’라고 해석한다면, 이 해석은 위에서 말한 이해의 기투[13]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존재의 의도대로(송곳은 뭔가를 뚫는 것) 이해되었다면 ‘송곳으로서’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즉 송곳에 대한 해석은 송곳을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대단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 해석의 새로운 형태인 ‘발언’(Die Aussage, 발언 또는 진술 표현력)
앞에서 말한 것을 정리해서 말한다면 모든 해석은 이해에 근거한다. 이해를 윤곽이 드러난 것을 분류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해석을 통해 분류하는 것이다. 발언 역시 이해에 근거한다. 즉 해석의 파생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14]
하이데거에 의하면 해석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으로서 구조’[15]밝히는 것이다. 발언 역시 해석처럼 단순히 언어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존재자 자체의 제시라고 규정한다. 그는 발언에는 다음 세 가지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발언은 제시를 의미한다. 이 말은 존재자를 그것 자체에서부터 보도록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송곳은 매우 날카롭다’라고 발언할 때 제시되는 것은, 송곳에 나타난 표상(날카로움)이 아니라 가용적 존재로 있는 존재자 즉, 송곳 자체이다. 이것은 발언이 그 존재자(송곳)의 있는 그대로의 표상, 혹은 표상된 것을 의미하지 않고 더불어 발언하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에 따른 표상도 아닌 것이다.
둘째, 발언은 주어에 대한 서술이다. 주어는 술어에 의해 규정된다. 송곳이 매우 날카롭다고 할 때 발언하려는 것은(즉 발언을 통해 서술하려는 본래 취지는) 매우 날카로운 ‘송곳 자체’이다. (송곳이 날카롭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발언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 있다. – 아포퐌시스[16]적 상황) 이것은 주어(송곳)에 대한 서술이지만 분명한 것은 ‘송곳’을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 송곳 자체는 아닐 수 있다.
셋째, 발언은 함께 나눔(전달 Mitteilung)이다. 발언으로 제시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보게 하는 것이다. 함께 보게 함은 제시된 그것의 규정성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함께 나눈다는 것은 발언으로 제시된 것을 공동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 때 전달되는 것은 표상이 아니라 존재자 자체이어야 한다.[17]
[1]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에 ‘Das Da-sein’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을 이기상은 ‘거기에-있음’으로 번역하고 소광희는 그대로 ‘현-존재’라고 번역한다. 하이데거의 본래 취지는 이 소단원에서는 Sein(존재)보다는 Da(즉 ‘현’ 또는 ‘거기에’)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5장(Das In-Sein als solches, 안에 있음, 그 자체)의 핵심 주제가 있음(영어 Being)이며 이것은 세계공간과 현존재 사이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현’, 즉 열려 있는 공간에 위치하는(거기에) 존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2]『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98쪽
[3] SZ 11판, 1967. 199쪽.
[4] 실존범주(liegt existenzial): 현존재(즉, 인간)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 동시에 세계-내-존재의 관계 속에서 가용적 존재들과 배려하면서 유지 존속하는 세계.
[5] 위의 책 같은 곳
[6] 기투(Entwerfen): 독일어로 ‘던지다’라는 뜻의 ‘werfen’에서 파생된 단어로 앞으로 던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피투 된 현존재가 가능성(미래지향성 즉 투사Entwurf)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7] 위의 책 201쪽.
[8]『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100~101쪽
[9] ‘이해의 기투’라 함은 이해가 이루어지려는 의지의 작용
[10] SZ 11판, 1967. 148쪽.
[11] 위의 책 같은 곳,
[12] 위의 책 149쪽
[13] 즉 현존재의 의도대로 이해되었다는 의미
[14] 위의 책 153쪽.
[15] ‘으로서 구조(als-Struktur)’의 개념: 인간은 사물이나 세계를 어떤 것으로서(als) 이해한다. 즉 송곳을 단순히 손잡이 나무와 쇠붙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뚫는 도구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객관적인 정보나 사물의 물리적 속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활동과 목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시) 책은 단순히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읽기 위한 도구로서 이해되고, 의자는 단순히 목재와 못의 결합이 아니라, 앉기 위한 대상으로서 이해되는 것 (SZ 11판, 1967. 150~152쪽 참조)
[16] 아포퐌시스(ἀπόφανσις)는 ‘판단’ 또는 ‘진술’을 의미. 또 다른 의미로 ‘무언가를 드러내는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를 통해 사물이나 상황의 진리를 판단하고 표현하게 된다.
[17] 위의 책 155쪽.
이탈리아 상징주의 화가 가에타노 프레비아티 (1852~1920) Il carro del Sole(태양의 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