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철학과 불교의 관계 파악을 위한 워밍업(1)
1. 실존 철학 이전의 고민
- ‘자아’ 및 ‘실체’에 대한 고민
밀린다팡하(Milinda Pañha또는 미란다왕문경)는 헬레니즘계 왕조인 인도-그리스 왕국의 국왕 '메난드로스 1세(밀린다왕)'가 인도 수도승 '나가세나'(Nāgasena, 기원전150년경 전후)에게 질문을 대화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그 중, 밀린다왕이 나가세나의 설명 중 가장 이해가 어려운 것으로 무자성(無自性)[1]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실체론적 사유에 익숙했던 밀린다왕에게 실체가 없다는 무자성의 세계는 듣도 보도 못한 세계였을 것이다.
서양에서 이 실체성에 대한 고민은 서양 근대철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논의되고 또 완성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세를 지배했던 분명한 생각은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그 어떤 정체성도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연히 ‘자아’는 실체의 범위에 들 수 없었다. 그러나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에 이르러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작으로 ‘나’라는 정체성을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물’은 일정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연장延長’(res extensa)의 실체로 파악한다. 천 년 이상 혼재되어 있던 ‘나’와 ‘사물’을 이렇게 독립시킴으로써 두 개의 독립적 실체가 성립된 것이다. 즉 ‘나’는 ‘사물’과, ‘사물’은 ‘나’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거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된 것이다.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의 합리론은 ‘자아’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한다.[2]합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마다 실체 개념을 약간은 다르게 정의하면서도 ‘자아’를 실체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반면 영국 경험론자들은 합리론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예를 들어 버클리[3]의 경우 실체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실체이며, 지각하지 못하는 것의 실체는 없다. 즉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 It is perceived to be)”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비물질론(immaterialism)자로 분류된다.[4]당연히 지각되지 못하는 ‘자아’는 실체의 범위에 있을 수 없다. 데이비드 흄(D. Hume, 1711~1776)[5]에 이르러서는 아예 ‘자아’를 ‘실체’의 그림자도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는 나의 마음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러 가지의 경험의 다발에 그저 ‘나’란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고 정의한다.[6]결론적으로 ‘자아’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상견론常見論과 단견론斷見論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즉 ‘나’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여기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 있다. 상견의 입장은 이러하다. 즉 인간은 죽지만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五蘊’[7]은 과거나 미래에 항상 머물러 불변해 끊어지는 일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단견斷見에서는, 나와 세상은 허무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허무론에 빠지는 약간은 극단적인 견해이다. 초기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르침이 상견과 단견인데, ‘연기법’[8]에서는 상견도 단견도 아닌 중도를 말한다. 이를테면 데카르트는 상견, 즉 없어지지 않는 ‘자아’를 인정한다. 반면 버클리나 흄은 단견, 즉 ‘자아’는 실체가 없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돌연 혼란스러워진다. 도대체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를 고정된 실체라고 이야기하면 오히려 지속적 흐름에 가깝고 지속적 흐름이라고 이야기하자니 멈춰있는 뭔가에 가깝다. 있다고 하자니 없고 없다고 하자니 확연하게 있다. 이 상황을 불교는 이렇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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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자아를 설명하는 말 중에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표현이 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하여 오고 또 간다.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지만 고정된 실체는 없다. ‘진공’은 말 그대로 ‘참다운 공’이다.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완전한 공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만물이 그렇게 존재하다가 사라진 것이다. 공의 그러한 형성작용을 ‘진공묘유’라 한다. 있음(有)에서 없음(無)을 보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보는 것이다. 반야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9]의 경지다.
하지만 플라톤 이후 이분법으로 굳어져 온 서양적 사고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겔[10]에 이르러 변증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지만[11], 오히려 ‘자아’만 더욱더 절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이를테면 헤겔은 ‘자성自性’과 ‘무자성無自性’의 세계에 다가서지도 못하였고, 더불어 연기의 실상을 깨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 무자성(無自性):반야경에서 말하는 무자성(無自性)은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공관(空觀)과 동의어이다. 즉,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서양적 실체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이야기다.
[2]『중학교 철학』 3, 김준식 지음, 교육과학사, 2024. 91쪽 이하 참조
[3]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년∼1753년): 영국계 아일랜드의 철학자, 과학자, 성공회 주교이다.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경험론(Empiricism)자로 유명하다.
[4] 같은 책 126쪽
[5]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년∼1776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론마켓 주변에서 태어난 계몽주의 철학자, 역사가, 경제학자, 사서, 수필가. 철학적으로는 극단적인 경험주의자이자 중립적인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6] 『Philosophical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David Hume, 제2부 Of the Origin of Ideas(생각의 기원), 25쪽.
[7]오온五蘊: 산스크리트어 panca-skandha, ‘온蘊’이란 산스크리트어 스칸다(skandha)의 번역으로서 덩어리, 무더기, 혹은 집합(적취/積聚)을 의미한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으로서 불교에서는 인간을 색色,수受,상想,행行, 식識의 ‘오온’으로 관찰한다. 이 다섯 감각기관이 감각과 인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오근五根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색은 몸이고, 수 상 행 식은 생각인데, 결국 ‘오온’이란 인간 육체와 정신의 구성요소이자, 생존해 움직이는 정신적인 활동과 육체적 활동 모두를 말한다.
[8] 연기緣起(patītyasamutpā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 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논리. 나아가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등으로 표현된다.
[9]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물질은 마침내 사라져 공한 것이고, 사라져 공한 것으로부터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로 순환한다. 그래서 물질이 텅 빈 공과 다르지 않고, 텅 빈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
[10] G. W. F.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1831년): 궁정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곱 살에 김나지움에 입학. 열 여덟에 김나지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튀빙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따분한 그리스도교 정통파의 교리 강의와 강압적인 생활 방식에 싫증이 나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특히 열아홉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그가 이성과 자유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바탕을 둔 철학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데 하나의 단초가 된다. 서른 한 살에 그의 학문을 꽃 피운 예나 대학에 입성해 그의 대저작들의 기점인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에서 그는 관념론 논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자신의 철학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다. 1807년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7)』을 발표한다. 마흔 여섯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된다.
[11]『중학교 철학』 2, 김준식, 교육과학사, 2023.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