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철학과 불교의 관계 파악을 위한 워밍업(2)
2. 세계-내-존재, 현존재, 그리고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
-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
실존 철학의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인식론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특히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불교에 대한 분석은 불교 유식론과의 상관관계를 밝혀야 하는데 여기에 인식의 문제가 개입된다. 이를테면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인식의 4단계 성립과정은 실존 철학의 '현존재'에 대한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유식 불교에서는 인식을 견분, 상분, 자증분, 증자증분[1]의 4단계로 구분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세계인식, 즉 세계-내-존재와 그리고 현존재와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먼저 상분(相分, 외부 대상)이란 마음이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나타나는 대상의 형상 또는 외부 세계로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실제로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만든 마음의 형상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눈에 보이는 사물, 귀로 들리는 소리 등이다. 이를테면 가용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인식의 과정과 유사하다.
견분(見分, 인식 작용)은 대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주체적 작용으로서 상분(대상)을 인지하는 역할이다. 상분이 나타나는 형상이라면, 견분은 그 형상을 ‘바라보는 주체’다. 예를 들면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행위 자체를 말한다. 현존재와 가용적 존재자, 그리고 세계와의 배려 및 배시에 대한 작용과 유사하다.
자증분(自證分, 자기 증명)은 견분(인식 주체)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는 작용. 즉 견분이 상분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의식의 층위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라는 자기 인식인데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임을 개시(열어 밝히는)하는 작용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증자증분(證自證分, 자기 증명의 증명)인데 자증분이 참된지 스스로 증명하는 작용. 가장 근원적인 의식 작용으로, 자기 존재와 의식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역할. 이는 의식의 궁극적인 확인 단계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참으로 진실하다’라고 확인하는 의식이다. 가용적 존재자와 현존재의 관계를 파악하는 단계의 인식작용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것을 제8식 아뢰야식에 비유하기도 한다.
- ‘Da-sein’, 그리고 ‘Da’
현-존재(Da-sein)의 ‘현(Da)’은 근본적인 열림(diese wesenhafte Erschlossenheit)[2]을 말한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존재인 현존재는 자신의 현(Da-나타냄, 열어서 밝힘)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존재는 선험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열어 밝히고 있다. (
현 존재의 개시성) 이것을 유식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유식학의 심식心識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3]
초기불교에서 심식心識(산스크리트 citta vijinana)은 죽음으로 육신에서 벗어나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초기의 불경에서 영혼이나 넋을 ‘심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부파불교 시대가 되면서 특히 소승불교에서는 심心과 식識을 동체이명同體異名이라 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갈래인 유식唯識에서는 ‘심’과 ‘식’을 따로 나누어 제8식을 ‘심’, 전 5식과 제6식은 ‘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에 해당하는 마음속의 인식작용, 즉 마음작용을 심식心識이라고 불렀다.
유식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 등 주체인 우리 안과 밖의 모든 것이 오직 심식心識에 의해 창조되며 이 심식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유정有情이 지니고 있는 여덟 가지 심식心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의 8식을 ‘심식’으로 규정한다. ‘심식’은 인식의 주체로서 대상의 내용과 모습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식’은 분별, 나아가 갈래 지움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한다. 만약 ‘심식’이 적멸한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 정각正覺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 심식, 그리고 견분, 상분
심식은 우리 마음의 현상화다. 그 현상화가 상분으로서의 세상이다. [4]이 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심식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향해 가진(주체적으로 본다면 열어 밝혀진) 마음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수단이다. 즉 육체를 가진 우리가 감각을 통해(즉 8식의 과정 전체를 통해) 자신과 사물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 규정의 방향으로 대상의 형상화를 자신의 심식 안에서 구성하는 작용이며 그 작용의 결과가 곧 세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내-존재의 배려로 나타나는 모든 작용은 심식의 작용이며 동시에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속에서 구성되는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견분이 작용하면 상분은 오직 견분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즉 현존재의 대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주체적 작용(견분)은, 실재한다고 믿는 외부의 대상이 어쩌면 우리의 의식이 만든 마음의 형상(상분) 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주체적 작용(견분) 없이는 어떤 대상이나 형상(상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1] 해심밀경 3품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 참조
[2] SZ 11판, 1967. 130쪽. 처음부터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상황, 즉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언제 파악될 수 있는 상태 또는 상황.
[3]『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김형효, 청계, 2001, 408쪽
[4] 앞의 책 같은 곳
René Magritte의 1959년 작품 The Glass Key.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