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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과 epoché(판단중지) (2)

by 김준식

후설[1]과 epoché(판단중지) (2)


- epoché(에포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피론주의[2]자들이 말하는 판단중지를 뜻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어의 epekhein(에페케인; 삼가하다, 멈추다)에 유래한다. 회의론자는 어떠한 생각에도 반론反論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을 중지해야만 하는데 이 상태를 ‘에포케’라고 불렀다.


피론주의 철학자 엠피리쿠스(Sextos Empeirikos, 2세기 중반-후반)는 ‘에포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에포케는 우리가 아무것도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는 지성의 상태이다.’[3] ‘에포케’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판단중지’라고 했지만 사실은 판단을 중지하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태를 중립적으로 보자는 의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는 상태, 즉 부정과 긍정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동양의 중용[4]의 태도와 비슷하다.


- 후설과 에포케


후설의 철학에서 ‘진실된 철학적 태도’란 세계에 대하여 열린 태도다. 후설이 살았던 시기(19~20세기)에는 이미 세계를 다루어 온 철학이론과 과학이론이 넘쳐났다. 엄청난 이론이나 규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설이 철학 하는 태도와 관련 지어 그 만의 새로운 규정을 시도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의 세계 개념은 정당한 철학적 태도에 근거해 규정되지 못했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후설의 논의는 일상적, ‘자연적 태도’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자연적 태도’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취하는 태도로써 익숙하고 의도하지 않는 태도다. 일상적, 자연적 태도는 그 자체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이러한 자연적 태도를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상의 태도(자연적 태도)를 철학적 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거의 습관에 가깝다.[5]


-자연적 태도, 판단중지


자연적 태도에 대한 판단중지는 자연적 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태도의 저변에 깔려있거나 전제된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먼저 중지하는 것이다. 곧 자연적 태도에 대한 판단중지란 ‘자연적 삶의 태도를 변경’하는 것이다.[6]


이를테면 자연적 태도에 따른 판단중지란 지금까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세계의 모든 존재에 대한 판단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계와 존재, 그리고 그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들의 여부에 대해 중립적 태도(중용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의한다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 ‘세계가 이렇게 존재한다.’ 혹은 ‘그렇지 않다.’ 등의 태도는 일단 멈추게 되고 나아가 모든 초월적 상황(심지어 신 까지도)조차도 멈추는 것이다.


후설의 이런 방식을 설정하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보아왔던, 그리고 생각해 왔던 세계는 오로지 우리의 관심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후설의 이런 방식은 우리는 우리가 규정했고 또 규정하려는 대상 속에 그것들을 규정하려는 우리의 규정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법론인 것이다. [7]



-판단중지의 목적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초월론적 의식[8]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하고자 한다. 즉, ‘이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고 보이는가?’라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면 판단중지의 순수한 목적은 ‘세계 자체와 세계 의식 간의 초월론적 상관관계의 발견과 탐구[9]’를 위함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세계 자체를 넘어 존재하는 세계 의식, 이를테면 어떤 것이 의존하지도 않고 어떤 것에 의해 규명되지도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완전한 상태를 이해하려는 기초적 단계로 판단중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후설에 의하면 “자명한 것을 의심스럽고 수수께끼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계 존재의 보편적 자명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학적 주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10]고 주장하였다.



-실존 철학과의 연결고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언어로 표현된 대상들은 일상언어의 오염으로 인해 대상의 본질과 너무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염된 언어로는 철학적 탐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입장은 하이데거 이전의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논의된 바 있다. 분석철학자들은 단지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언어에 개입된 불순물을 분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하이데거와 동갑내기인 분석철학의 대가인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책 『논리철학논고』에서 이렇게 표현한다.[11]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언어체계를 통해서는 자신의 철학적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비트겐슈타인과 생각이 같았지만 하이데거는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의 언어를 창조하게 되는데 기존의 언어체계로 해석되는 세계에 대하여 ‘판단중지’하고 다시 새로운 언어체계로 자신의 철학적 세계를 열어간 것이다.


[1]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 1938)




[2]피론주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의 생각. 회의주의(懷疑主義Skepticism)라고 부르기도 함. 회의주의(철학적 희의주의)란 단순한 믿음이나 도그마(Dogma: 독단이나 집념 또는 고집 등으로 해석됨)로 간주되는 지식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의심하는 태도를 말한다. 회의론자들은 불신보다는 믿음의 중단, 즉 주장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3]Outlines of Pyrrhonism, Sextos Empeirikos, Translated by Benson Mates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Oxford 1996. Book I, 3쪽




[4]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庸平常也(‘

중’이라 함은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않음도 없는 것의 이름이요, 용은 평평함이 유지되는 상태다.)




[5]『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박인철 지음, 살림, 2013, 21쪽.




[6]『위기』: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Den Haag, 1976. 151쪽 이하




[7]앞의 책, 146쪽




[8]세계-내-존재로서의 경험적, 심리적 의식과는 차별화되는 ‘순수 의식(reines Bewusstsein)’을 가리켜 후설은 특별히 ‘초월론적 의식(transzendentales Bewusstsein)’ 혹은 ‘초월론적 주관성(transzendentale Subjektivität)’이라고 부른다.




[9]앞의 책, 154쪽




[10]앞의 책, 183~184쪽




[11] 3.323~3.328, 4.002, 참조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udwig Wittgenstein, Translated by C. K. Ogden,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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