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과 착각
초침이 없는 시계는 잠시 보면 정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 지나 보면 분명 시간은 가고 있다. 하늘에 구름이 한 조각 떠 있다. 멈춰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좀 있다 쳐다보면 이미 이전 모습은 아니다. 어쩌면 사라져 버리고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잠시도 변화를 멈추지 않는 시, 공간 속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사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불완전한 것을 보면 이런 의심은 대단히 합리적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간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우주적 질서이기도 한 변화 혹은(알 수 없는 방향 이기는 하지만) 진행의 존재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변화는 결코 시간의 작용이 아니다. 단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변화한다. 멈춰서는 것은 곧 종결이다. 종결의 다른 이름은 죽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결되거나 또는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다.
범위를 ‘나’로 좁혀 보자. 비록 나는 내 몸의 주인이지만 내 몸을 주체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즉,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 몸은 변화한다. 심지어 나의 시작과 종결의 그 어떤 부분에도 내 의지는 작용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시작과 종결 사이 존재하는 과정에 나의 의지가 약간 개입하는데, 사실 이것조차도 불분명해서 나의 의지인지, 아니면 의지인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호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이를 테면 나의 삶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하여 역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종결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과정 자체도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사실 별로 없거나 거의 없다. 실제로 우리 삶의 과정은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조합일 뿐, 여기에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개입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때로 착각처럼 또는 환영처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이 거대한 착각일 수 있다.
2. 반달
달은 지구 주위를 시속 약 3679km로 돌고 있다. 거의 1초에 1km를 넘는 빠른 속도다. 하지만 멈춰있다. 아래 있는 달 사진의 셔터 속도는 320분의 1초다. 계산하자면 이렇다. 달은 초당 약 1000m로 가는데 320분의 1초에 가는 거리는 1000/320=3.125m이다. 참고로 달의 자전 속도는 1초당 4m이니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카메라를 든 내가 서 있는 지구는 태양 주위를 평균 초속 29.78km로 돌고 있으니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달을 촬영하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다만 지구와 달이 약 38만 km 떨어져 있어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달도 정지한 것처럼, 나도 정지한 것처럼 이렇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일이 이와 같을 지도 모르겠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 사태의 방향과 흐름을 알 수 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달과 지구처럼 기막힌 사실이다. 가까이 있으면 미세한 일부는 알 수 있지만 전체적인 방향이나 흐름을 대부분을 놓치는데, 그 이유는 달과 지구의 속도처럼 너무 빨리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완전한 시야각도 한몫을 한다. 통상 인간의 시야각은 220도지만 사물을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시야각은 60도 범위 안이다.(개인차가 조금 있다.) 반면 멀리 떨어져(일반적으로 5km 이상) 있으면 360도는 어렵지만 최소한 180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론은 이렇게 잘 알고 있어도 정작 내 삶을 내가 떨어져서 보지 못하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 오늘도 나는 내 삶 속에 코를 대고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