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기대하며
아직 한 낮은 열기가 대단하다. 그렇다고 밤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여름이 길어지고 있다. 보통 입추를 지나면 더위를 견디기가 조금 쉬워지는데 이제는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짧은 가을은 올 것이다.
우주의 첫날과 우주의 마지막 날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날이 그날일 것이다. 하지만 나약한 나는, 아니 우리는 애써 그 지극히 평범한 날들을 구획한다. 그런 구획에 따라 나에게 다가온 것이 정년퇴직이고 내일이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살아가는 모든 일에 반드시 동기가 있을 필요는 없다. 그저 그런 일로 소비하듯이 살아도 혹은 치열하게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살아도 삶은 기간이 정해진 일이므로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치열한 삶에서 가끔 동기라는 것이 더해지면 다른 삶과 차별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삶이 치열하고 그 치열함에 동기가 있다면 삶은 일과성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밤이 가고 또 아침이 오는 이 지루한 일상에서 동기 혹은 계기라는 도구를 획득한다면 늘 새로운 아침이며 늘 새로운 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퇴직이 내 삶에 그런 동기로 작용하기를 빌어 본다.
나의 의식 속에는 아득한 석기시대로부터의 경험과 그 후 시간에 의해 축적된 과학적 진리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편견들,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잠재된 철학적 전망과 예측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Marcel Proust(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가 바삭한 과자 한 조각을 곁들인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시골집에서 할머니가 차에 적셔주곤 하던 마들렌 조각이 생각나듯. 프루스트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차에 적신 과자의 맛은 죽은 시간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의 맛이다” 이를테면 합리적인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을, 차와 비스킷이라는 수단에 의해 우리 몸 특정한 기관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가을, 시원한 날이 오면 현재의 내가 도저히 다가설 수 없거나 혹은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하는 나의 독창적인 그 무엇을 슬그머니 발견할 수 있기를 역시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