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혁명성의 상징, 부처의 32상
추석 명절, 딸아이가 떠난 휑한 기분을 달래며 베다를 읽다가 그 옛날 장아함경의 32상 중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부처의 평발(족하안평립상足下安平立相 발바닥이 평평하고 안정됨.)이 불현듯 이해되었으니…… 실로 50년 만의 깨우침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 시절 불교와 인연을 맺고 미묘한 말들이 가득한 불경을 읽고 또 외우면서 드는 의문들이 많았다. 그중 부처가 되려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약간 억지스럽다는 생각조차 있었다.
부처가 되려면 32상을 갖춰야 된다는 『장아함경』의 이야기를 나의 스승이신 철오 스님(2024년 원적에 드심)께 여쭤보아도 이렇다 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32상 각각의 모양에 대한 설명은 해 주셨으나 왜 그런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상징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가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기야 당시 내가 어렸기 때문에 일부러 말씀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처 생존 당시 인도를 지배했던 사상체계와 가치체계는 철저한 신분적 제도 위에 존재했던 브라만 전통이었다. 브라만 전통은 엄청나게 많은 신들을 섬기는 전통이었는데 이를 테면 인드라, 아그니, 바루나, 미트라, 루드라, 비슈누, 수리야 등으로서 이들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적은 것이 베다인데 베다의 뜻은 ‘지식’, ‘앎’, ‘성스러운 지혜’를 의미한다.
베다 중 가장 오래되고 기본이 되는 리그베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신들은 땅을 딛지 않는다(Devaḥ na pṛthivyām tiṣṭhanti)”『Rig Veda』 10.81.3 (히란야가르바 찬가)
부처 당시 일상을 지배했던 브라만의 모든 의식에 등장한 베다 속의 신들은 땅을 딛지 않는다. 즉 그들은 땅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땅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이란 하늘과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다. 땅의 의미는 브라만의 최하위에 있는 대중(바이샤, 수드라)이다. 베다의 신들은 그들과 다른 고귀하고 높은 신분(브라만, 크샤트리아)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당연히 신이기 때문에 땅을 걸어 다닐 수는 없다.
부처는, 아니 정확하게 부처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었던 부처를 묘사하면서 철저하게 브라만 전통을 부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노력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이 부처의 평발이다. 특히 부처의 평발은 발바닥에 그 어떤 굴곡(흔히 우리가 아치라고 표현하는)도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땅바닥에 발이 닿는 발이라는 것이다. 즉 베다의 신들이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존재라면 부처는 그 반대로 완벽하게 땅에 발을 붙인, 땅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중과 같은 존재, 거기로부터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은 자인 부처의 의미가 강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싯다르타(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의 발을 절대로 평발일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는 일생을 유람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분이기 때문에 평발로는 그 정도 거리를 절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실존의 부처를 두고 32상에서는 평발로 묘사했다는 것은 브라만 전통에 대한 혁명적 사고의 발상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깨달은 자라 해도 부처 당시 브라만의 전통을 표면적으로 반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부처의 제자들은 당시의 전통에 도전하였을 것이다.
부처의 32상은 부처 입멸 후 알렉산더의 인도 정벌(B.C.4세기)에 따른 헬레니즘의 영향이 매우 컸다. 알렉산더(아랍어로 이스칸데르)의 원정으로 전해진 헬레니즘의 영향, 특히 인체像은 당시의 인도인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주었고 자신들의 성인인 부처를 그 방식대로 제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부처 당시는 부처의 모습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32 상의 대부분은 당시 브라만의 전통에 대한 부처 제자들에 의한 혁명적 사고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50년만의 깨달음이다.
*부처 발 사진은 구글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