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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19. 2016

Campagne de France 1814, 1864

관점의 오류에 대하여

 Campagne de France 1814, 1864. Oil on canvas, 51.5cmⅹ76.5cm

서사화(Epic Painting)의 등장, 

Jean-Louis-Ernest Meissonier(쟝 루이 에른스트 메쏘니에)의 

Campagne de France 1814(1814년의 프랑스 군대) 1864


Napoléon Bonaparte(나폴레옹)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군인으로서의 나폴레옹과 황제로서의 나폴레옹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도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군인 나폴레옹을 위대한 승리의 대명사로 알고 있지만, 그에게도 뼈 아픈 패배의 기록은 분명 있다. 그가 직접 지휘관으로써 지휘한 전투 횟수는 약 6~70번 정도였는데 그중 패배한 전투는 대개 9~11번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견이 많다.)


그림은 라옹의 전투에서 패퇴하는 장면이다. 나폴레옹 체제의 몰락 속도를 가중시켰던 이 전투(1814년 Battle of Laon)는 프러시아 연합군과의 싸움이었고 프랑스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전투였다. 이 전투의 패배는 이전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더불어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전환점에 있는 전투였다. 따라서 이 그림은 을씨년스럽게 추운 날, 해지는 어두운 풍경을 배경으로, 패배한 전투에서 이제는 몰락해버린 한 영웅이 쓸쓸히 돌아오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Jean-Louis-Ernest Meissonier(쟝-루이-에흐네스트 메쏘니에, 1815~1892)는 나폴레옹 전문화가로 유명하다. 본업은 조각가였지만 역사화가, 특히 군사화가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작업은 비교적 작은 캔버스에 매우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그림 역시 가로 76Cm, 세로 51Cm 안에 매우 정교한 솜씨로, 눈 녹은 황톳길을 행진하는 많은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앞 쪽의 나폴레옹이 탄 말과 그의 부장들의 모습은 마치 사진처럼 선명하고 예리하게 묘사되어 있다.


염료 사업을 하던 메쏘니에의 아버지는 메쏘니에가 자신의 사업을 계승하기 바랐지만 학교에 들어간 메쏘니에가 색채의 사용뿐만 아니라 스케치에도 발군을 실력을 보이 자화가로서의 삶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17살 되던 해 로마상에(Prix de Rome) 2등으로 입상하여 유명한 역사화가였던 LéonCogniet(레옹 코니에) 스튜디오에 입학을 허가받게 된다. 30대가 된 메쏘니에는 역사적 장면을 묘사하는 화가로써 당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특히 그의 화풍과 묘사 대상이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역사화가 Gabriël Metsu(가브리엘 메츄)와 닮아 그를 “프랑스의 메츄”로 불리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해는 1804년이었다. 그 뒤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이 전투의 패배로 1814년 실각하여 엘베 섬으로 유배된다. 하지만 1815년 2월 엘베 섬을 탈출하여 3월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복귀하지만 이미 그의 시대는 가고 있었으며 100일 뒤,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하는 연합 함대에게 워털루에서 참패하여 대서양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게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10년의 짧은 황제의 재위 기간 동안 매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역법(曆法 –달력)의 통일과 미터법의 제정, 법전의 제정 등은 오늘날 프랑스를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굳은 표정으로 맨 앞 백마를 탄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인데 말에 앉아 있음에도 체구는 매우 작아 보인다. Chapeau Bicorne를 쓴 나폴레옹은 화면의 중앙보다 조금 앞 쪽에 위치하고 있는 데에는 메쏘니에의 의도적 장치로 보인다. 여전히 프랑스 군을 이끌고 있으며 아직 황제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면의 왼쪽 아래에는 프로이센 군의 Pickel haube(피켈 하우베)가 눈 밭에서 뒹구는 것이 보이는데 패전으로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묘사이었음에도 화가는 의도적으로 프로이센 군의 철모 하나를 묘사함으로써 그나마 프랑스 군대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고 있다. 




장자 이야기


관점의 오류에 대하여


장자 <대종사>에는 사인방이 나온다.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리(子犁), 자래(子來)가 그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잘 웃는다. 그들은 왜 잘 웃는가? 도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여가 병에 걸렸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조물주와 구분하는 의미로 쓰임)!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병에 걸린 자여의 신체는 자사의 눈에 “곱사등이”로 보였다. 동시에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 모두가 “위대한 조물자”가 만든 것이다. 이때 조물자는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또 다른 실체라기보다는 생명을 탄생시킨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도”를 이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도” 오로지 변화하는 속성으로 나타나니 자여의 “곱사등이”이 됨은 도가 변하는 순간인 것이다. 자사는 그 순간을 위대하다고 감탄한다. 곱사등이가 된 자여는 어땠을까?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 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그 활로) 올빼미를 잡아 구워 먹겠네. 내 꼬리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자여는 생명, 무 생명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지닌 “타고난 바탕을 온전히” 하겠다고 선언한다. 도를 터득한 친구 사이라서 가능한 화답이다. 아마도 그들은 또 웃었을 것이다. 장자가 들었다면 웃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다른 논증의 도구를 쓰며 증명하려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웃음이라는 것조차도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가 움직이는 의미를 인간은 알 수 없다. 


그저 인간이라 말이라는 행위 전에 입을 크게 벌리고 또, 입 꼬리를 올리고 눈을 감거나 작게 뜨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도통하는 경험이 반복되자 그것을 ‘웃음’이라 규정한 것뿐이다. 그저 그러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웃음을 슬픔을 극복한 웃음이라기보다 도를 깨우치자 저절로 그러한 신체활동이다. 그들의 말은 자신이 처한 변화를 부정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도달한 긍정의 경지라기보다는 그저 그러한 순간을 말하는 신체활동일 뿐이다.   


그들이 잘 웃는 것은 도를 터득한 경지에 머무르는 것을 드러내는 신체 활동이다. 그러면 잘 웃는 사람은 그만큼도를 터득한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계해야 한다. 말의 속성인 분별이 갈라놓은 수많은 웃음의 종류라는 지식의 늪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저 웃는다는 말속에는 <덕충부>에서 사람들의 말에 그저 ‘맞장구’ 치던 애태타의 의미 없는 웃음도 있을 수 있다.


장자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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