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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01. 2017

Das Pflügen

알프스의 풍경

Das Pflügen, 1890. Oil on Canvas, 227cm x 116cm, Neue Pinakothek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출신의 ‘Giovanni Segantini(Giovanni Battista Emanuele Maria Segatini; 지오반니 ‘세간티니’,1858~1899)’는 19세기 말 천재 화가로 평가받는 풍경화가이다. 그의 고향은 당시는‘Austria-Hungary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County of Tyrol(티롤) 왕국’이며 현재와 이름이 같은  ‘Arco, Trentino(트렌티노 주 아르코)’에서 무역 중개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역상이었던 아버지의 부재와 바로 위 형이었던 ‘Lodovico (로도비코)’의 죽음은 어린 ‘세간티니’와 그의 어머니를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고, 이런 이유로 ‘세간티니’의 삶과 예술에는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깔려있다.


‘세간티니’의 어린 시절 삶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죽었고, 그의 아버지도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죽음으로서 고아가 된 ‘세간티니’는 아버지의 전처 손에 키워지게 된다. 그 뒤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온 ‘세간티니’는 간단한 수선기술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여전히 읽고 쓰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완전히 읽고 쓰게 된 것은 30대가 되어서였다.


‘Das Pflügen(영:Ploughing, 쟁기질)’이라는 제목처럼 봄이 찾아온 들판에 농부들이 땅을 쟁기로 갈아엎고 있는 풍경이다. 여전히 흰 눈이 가득한 알프스 고산지대의 풍경을 ‘세간티니’ 특유의 표현방식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그가 가진 예술적 방향을 알게 한다. 그가 처음으로 예술교육을 받은 것은 19세가 넘어 입학한 밀라노의 ‘Brera Academy(브레아 아카데미)’였는데 이곳에서 ‘세간티니’는 매우 초보적인 예술교육을 받게 된다.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일종의 사회 변혁운동단체였던 ‘Scapigliatura(스카 피글리아투라, 영: Disheveleds, 헝클어진 또는 어수선한의 뜻)’에 참여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화가, 음악가, 시인 등 다양한 예술가들 이참 여하게 된다. 이 시기에 사귄 두 명의 친구 ‘Carlo Bugatti(카를로 부가티, 1856~1940; 실내 장식 예술가)’ 와 ‘Emilio Longoni(에밀리오 롱고니, 1859~1932; 화가)’였는데 이 두 명의 친구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세간티니’의 첫 예술적 작품은 ‘Il Coro di Sant'Antonio(The Chancel of Saint Antonio;성 안토니오의 성채)’였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 뒤 일생의 후원자였던 화가이자 화상이었던 ‘Vittore Grubicy de Dragon(빅토르 그루 비치 데 드라곤, 1851~1920)’을 만나게 되면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다. ‘드라곤’은 ‘세간티니’에게‘Anton Mauv(안톤 모브, 1838~1888; 네덜란드 사실주의 화가)’의 작품과 ‘Jean-FrançoisMillet(밀레, 1814~1875)’의 그림을 소개하였고 이것은 ‘세간티니’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Il Coro di Sant'Antonio, 1879. 개인소장


그가 21세 되던 해 친구 ‘부가티’의 여동생 ‘Luigia Pierina Bugatti(1862~1938, ‘Bice’로 불림)’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이듬해 결혼에 이르지만 ‘세간티니’의 국적문제(티롤 출신의 그를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모두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결혼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게 된다. 1880년 ‘세간티니’와 ‘바이스’는 이탈리아의 북부 알프스의 산악도시 ‘Pusiano(푸치아노)’로 이주하여 친구 ‘롱고니’의 집에 살게 된다. 이때부터 ‘세간티니’는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그림을 외광에서 작업하게(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처음 작품이 바로 ‘Ave Maria(아베마리아)’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1883년 ‘World's Fair in Amsterdam(암스테르담 미술 품평회)’ 에서 금상을 차지하게 된다.


‘세간티니’의 광선 묘사는 알프스 특유의 밝은 광선의 효과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분할주의’ 혹은 ‘점묘 풍’의 붓 터치로 풍경을 묘사한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그가 살았던 알프스의 영향이 컸는데 고원지대의 강렬한 햇볕을 받은 풍경과 그 빛의 반사로 나타나는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을 외광 속에서 작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세간티니’의 회화 속에 또 하나의 큰 흐름은 바로 ‘Symbolism(상징주의)’이었다. 상징주의는 큰 의미로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저항으로부터 생겨난 예술적 경향으로서 ‘ Spirituality(영성)’ ‘Imagination (상상)’의 관념에 집중하여 전개되는 예술적 운동이다. 문학에서 출발한 이러한 움직임은 곧 회화 및 다양한 예술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회화에서는 프랑스의 ‘Henri Fantin-Latour(앙리 팡텡 라투르, 1836~1904)’와 독일 출신 풍경화가 ‘Eugen Bracht(에우겐 브라흐, 1842~1921)’ 등이 대표적이다.


강렬한 봄 햇살에 부서지는 빛의 느낌을 매우 섬세한 점묘로 묘사하고, 두 마리의 말을 끄는 농부와 땅에 쟁기질을 하는 농부 뒤로 보이는 밝게 빛나는 마을은 ‘세간티니’의 그림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풍경이다.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그려진 이 그림은 그가 꿈꾸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이루려던 예술적 성취는 무엇이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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