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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23. 2016

Orphée, 1865.

감정은 빈 곳에서 나오는 노랫소리.

Orphée,1865. Oil on canvas, 154cmⅹ99.5cm

상징주의 회화의 걸작 

Gustave Moreau(구스타브 모로)의 Orphée(오르페우스) 1865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콜 키스의 공주 메데이아는, 금양 모피를 지키는 용을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의 약을 이아손에게 주어, 그가 금양 모피를 구하고 고향 테살리아로 돌아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금양 모피를 구하기 위한 이아손의 모험에 함께 한 아르고호 원정대(Argonauts)의 일원이었던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상과 지옥에서 두 번이나 잃은 후 비탄에 잠겨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오르페우스는 여성 혐오자로 변하여 여자를 멀리하고 어린 소년들과 가까이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를 동성애자 여겼다. 오르페우스가 살았던 지역은 트라키아의 영토였는데 트라키아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디오니소스 숭배자가 많았다. 해마다 열렸던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평소 오르페우스의 동성애적 경향을 혐오하는 흥분한 디오니소스 여사제들에 의해 오르페우스는 살해당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강물에 버려진다. 강에 버려진 그의 머리와 리라는 떠내려가면서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모로의 “오르페우스”는 그렇게 죽은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거둔 트라키아 처녀의 표정을 통해 그의 기괴한 죽음과 고통, 그리고 그에 대한 또 다른 트라키아 여인(디오니소스의 사제가 아닌)의 회한의 분위기 등을 환상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Gustave Moreau(구스타프 모로, 1826~1898)는 건축가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모로는 François-Édouard Picot(프랑소와 에두아르 피코)의 살롱에서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친구이자 스승인 Théodore Chassériau(테오도르 샤세리우)를 만나게 된다. 모로는 샤세리우와 만남을 통해 샤세 리우가 매혹되었던 Eugène Delacroix(들라크루와)와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앵그르)의 영향을 동시에 받게 되었는데 그의 세밀하고 정교한 밑그림은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의 주제인 오르페우스는 모로를 시작으로 세기말의 상징주의를 매혹한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로에게서 음악을 배운(혹은 아폴로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음악의 창시자인 동시에 신비주의 종교의 사제였다. 그의 죽음은 예술가의 자기희생 혹은 예언자의 순교로 해석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오르페우스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모로 역시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두고 이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로의 예술적 경향에 대해 상징주의(Symbolism)라는 표현을 쓰는데 상징주의자들은 리얼리즘이 그리는 사물의 단순 명백한 사실을 넘어 사물이 가진 이면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무릇 예술가는 이러한 특별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며 따라서 예술가는 사물에게 내재되어 있는 신의 뜻을 이해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상징주의 화가들은 스스로를 히브리어의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Nabis)라고 불렀는데 상징주의 화가들을 특별히 ‘나비 파(Les Nabis)’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로가 그린 화면은 매우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화면에 서 있는 트라키아 여성의 모습은 섬세한 무늬로 짜인 옷감으로 치장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보석 장신구를 걸치고 있다. 이것은 모로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그림의 표면 자체에서 보석이 박힌 듯한 마티에르(matière - 질감)를 보여주기 위해 물감을 덧칠하는 임파스토 기법뿐만 아니라 심지어 캔버스를 긁고 문지르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장자 이야기


감정은 빈 곳에서 나오는 노랫소리.


큰 꾀는 느긋하나 작은 꾀는 좀스럽다. 큰 말은 담담하나 작은 말은 시끄럽다.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육체가 활동을 시작하여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다툼질에 속이 썩어 우물쭈물, 음흉하거나 또는 좀스럽다. 


사람들은 작은 두려움에 기 죽고, 큰 두려움에는 아예 기절하고 만다. 자신의 이익이 결부되는 일에 있어서는 쇠뇌의 화살이 날아가듯 날쌔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누군가와의 승부에서는 하늘에 두고 한 맹세라도 한 듯 끈질기게 반드시 이기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을 겨울에 초목이 말라 가는 것 같이 날로 쇠약해 가고, 욕심이 앞서는 일에 빠져 들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그 모습이 늙어갈수록 더욱 욕심을 내게 하고 또 그 욕심은 욕심을 부르게 된다. 마침내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의 마음은 본래의 면목으로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이 모두는 사람의 빈 곳을 거쳐 나오는 노랫소리요, 습한 곳에서 자라는 독버섯처럼 해롭다. 이 모든 감정이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도대체 어디서 나와 어디로 흘러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감정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감정이 나타날 데가 없다.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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