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Weltals Wille und Vorstellung
Die Welt alsWille und Vorstellung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8. Arthur Schopenhauer)에 기초한 음악이야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악마 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끝도 없는 탐욕으로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과일을 따먹기 위해 손을 내밀지만 닿지 않고, 물이 입에 닿으면서도 절대로 마실 수 없는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는 탄탈로스처럼 우리는 언제나 욕망에 굶주려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생지옥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술 작품에 몰입하면, 나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욕망이 줄어들고, 그 원인을 따지는 일 역시 잦아든다는 것입니다. 어떤 개념이나 목표 때문에 골몰하는 것이 줄어들어 머리가 잠시나마 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도 생각나지 않는,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나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무아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이런 입장은 예술의 무관심성, 무개념성, 무목적성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위대한 선배 철학자 칸트의 주장과 상통하는데, 분명 칸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음악을 그리 좋게는 보지 않았습니다. 음악은 덧없고 자극적이며 통찰력을 길러주는 기능이 약한 예술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칸트는 그나마 이런 음악이라도 언제나 가까이하여야만 최소한의 철학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칸트의 뒤를 이은 헤겔은 칸트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지만 너무 엄숙합니다. 그는 음악을 물질에 구속되지 않는 내면적인 예술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나, 패턴 반복, 조바꿈 같은 효과로 재미를 선사하는 음악이나 기교만 부린 음악은 진짜 음악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음악으로 장난치면 안 된다는 얘기겠지요.
또 헤겔은 관념론자답게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진지한 내용을 전달하는 예술을(성악)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더욱 열렬히 지지한 것은 詩였습니다. 시는 소리에 구속받지도 않고 관념적인 내용을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어서 음악보다 고급 예술이라는 것이지요.
쇼펜하우어는 칸트나 헤겔보다 음악을 훨씬 많이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주 음악회에 갔다고 합니다. 따라서 음악에 대한 입장도 칸트나 헤겔보다는 훨씬 더 호의적이었습니다.
그의 이 책에 의하면 어떤 예술이든 제각기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음악은 매우 특별한 예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른 예술은 의지의 그림자를 표현하지만, 음악은 "음악을 통해 의지 자체의 몸부림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라고할 정도로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또,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없고, 말로는 더더욱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의 깊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음악이며 음악 속에는 세상의 거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다."라고도 했습니다. 즉, 한마디로, 음악은 ‘문자화 되지 않는, 어쩌면 되어서도 안 되는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음악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겪는 객관화되고 균질화된 즐거움, 고통, 공포, 슬픔이 아니라, 즐거움, 고통, 공포, 슬픔 그 자체를 표현하며, 따라서 음악은 사태의 精髓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음악의 파급효과가 다른 그 어떤 예술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렬한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음악은 굳이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음악 자체가 풍부한 언어이며, 최고의 주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지요. 철학적으로 정의된 개념은 추상적이고 실체를 싸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음악은 대상의 내밀한 핵심만을 전달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이고 훌륭한 사례가 바로 영화의 배경음악입니다.
영화에서 배경 음악은 그 사건, 행동, 환경이 지니고 있는 내밀하고 완전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우울한 장면에 우울한 배경 음악이 흐르면, 슬픔은 배가되지요. 비극적인 영화 장면에 명랑하고 경박한 음악이 흐르면 그 영화는 틀림없이 맹 비난을 피하기 어렵고 동시에 흥행에도 실패할 것입니다.
음악의 구조는 세상의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음악에서 쓰이는 和音은 세상 모든 존재의 위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음은 의지가 드러나는 단계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물질, 이를테면 우주, 자연, 질서 등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 만물의 토대로써 가장 느리고 무겁게 움직입니다. 음악에서 저음이 가장 느리고 변화가 없는 것도 같은 이치로 볼 수 있겠지요.
저음보다 조금 높은 중간 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 식물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 단계의 존재는 뚜렷한 개성이 없기 때문에 인식을 하기 위해 매우 정밀한 주의집중이 필요합니다. 음악에서 중간 음을 듣고 쉽게 그 음을 분별해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음색이나 기타 미묘한 차이에 대한 조건을 뺀다면 말입니다.
이 고, 저의 음들이 함께 소리를 내기 위해 수직적인 위계를 가지는 상태를 푼크투스(화음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연결된 상태 즉, 화성)인데 여기에 사용되는 화음에서, 가장 높은 선율(멜로디)은 의지가 드러나는 단계 중에서 가장 높은 자연 개체인 우리 인간의 지적인 삶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러한 선율이 엄청나게 다양한 것은 그만큼 개체의 생김새와 살아가는 모습이 다양하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음악은 균형입니다. 특히 기독교적인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중세의 고 음악으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은 바로 균형(Aequilibrium –Equilibrium)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음악으로 Beethoven의 음악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9개의 교향곡은 곡 각자가 매우 균형적인 동시에 9개의 곡 전체가 훌륭한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향곡 제 3번, 5번, 7번, 9번은 이를테면 매우 남성적이고 씩씩하며 직선적인 베토벤의 음악적 성향을 잘 보여 줍니다. 이것을 시간의 진행으로 표현한다면 메트로놈의 추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3번 교향곡 '에로이카'(영웅)의 4악장, 5번 교향곡 운명의 3악장과 4악장, 7번 교향곡(여기에는 표제가 없습니다.)의 1악장과 3악장, 9번 교향곡 합창의 4악장은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기관차처럼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그런가 하면 4번 교향곡(여기에도 표제가 없습니다.)의 전 악장, 6번 교향곡 전원의 1, 2악장은 유려하고 동시에 순환적이며 지긋한 느낌을 우리에게 줍니다. 물론 교향곡 한 곡이 전체적으로 대단히 균형을 이루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겉으로는 혼란스럽지만 그 밑바닥에는 놀라운 균형이 깔려 있다. 그의 교향곡은 얼마 가지 않아 아름다운 조화로 끝맺기 위한 치열한 난투를 드러내고 있으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물들이 생멸하고 끊임없이 공간을 넘나드는 세계의 본질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그의 교향곡은 인간의 모든 감정과 격정,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절망과 희망을 미묘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영혼이 충만한 하늘나라에 있는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일반적으로 칸트와 헤겔을 비롯한 관념론자들은 음악을 형이상학적인 목적이나 정신적인 수양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고, 쇼펜하우어도 기본적으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음악이 일종의 정신수양이고, 고상한 음악과 유치한 음악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중세 기독교 사회 전체를 지배한 사고방식이며, 지금도 이렇게 음악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클래식(고상한 음악)이라고 불리는 음악들은 일반 대중들과는 유리된 일부 사람들이 즐기는 매우 고급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와 아주 밀접하지 못한 학문이나 예술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사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감흥이나 지적인 자극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음악도 그러하겠지요. 음악을 둘러싼 정치, 경제적인 배경을 무시한 채 ‘고독한 개인과 음악’의 관계에만 치중하고 그 상호관계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학문이나 예술의 본질에 배치하는 것인데 칸트를 비롯한 헤겔, 쇼펜하우어는 이 개인과 음악의 관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상대적 관점, 즉 세상과 학문, 그리고 세상과 음악의 관계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칸트와 쇼펜하우어는 외부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고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매우 부조리하지만 스스로 그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현실을 자각하다 보니 방향을 이렇게 돌린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칸트도 프로이센 왕국의 여러 전쟁, 즉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공포와 무력함을 느꼈고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위대한 관념론자로 만든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존경했던 침침했던 칸트와는 달리, 음악의 잠재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음악과 세계에 대한 상대론적 관점을 상당 부분 수용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았던 19세기 유럽 낭만주의자들의 의견에 쇼펜하우어는 슬그머니 동의하면서 이 책을 끝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스스로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