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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ug 21. 2016

La Peste à Rome,1869.

혼돈의 논리와 자연의 질서

La Pesteà Rome, 1869. Oil on canvas, 131cmⅹ176.5cm

아카데미 화풍의 정점, 

Jules-Élie Delaunay(쥘 엘리 들로네)가 그린 

La Peste à Rome(로마의 흑사병) 1869


Jules-Élie Delaunay(쥘 엘리 들로네, 1828~1891)는 앵그르로부터 시작한 프랑스 아카데미 화풍의 정점에 위치하는 화가다. 그의 그림은 고전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전주의를 넘는 새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에 신고전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림의 내부에 흐르는 시대적 분위기는 그를 고전주의 작가의 범위로 묶어두기에는 뭔가 다른 것이 감지되기도 한다.


화면의 중앙에 배치된 죽음의 정령은 날개 단 천사의 지시에 따라 죽음과 파괴의 창을 문에 꽂으려 하고 있다. (이것은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 흑사병을 신의 저주로 보았던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거리는 주검이 널브러져 있고 동시에 죽어가는 사람들도 여기저기 있다. 이름뿐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당시 로마 시내 도처에서 창궐했던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흑사병은 원래 야생의 다람쥐나 들쥐 등에게만 나타나는 전염병이었지만, 쥐의 벼룩을 통해 병원균이 사람에게 전염되고 전염된 환자가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면서 튀어나오는 균이나 분비물로 인해 매우 빠른 전염 속도를 보이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이 그림을 그린 들로네는 주로 벽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벽화가 아닌 캔버스화로 크기는 131CmⅩ176.5Cm로서 일반적인 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 Théophile Gautier(테오필 고티에)는 그 크기가 작은 것을 몹시 아쉬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진지한 분위기가 그림을 지배하고 있어 크기만 조금 더 크다면 아름답고 좋은 역사화가 되었을 것이다. 크게 확대되어 넓은 전시실에 걸린다면 로마의 흑사병(La Peste à Rome)은 살롱전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호평받을 것이다.”

이 그림의 분위기는 암울하고 어둡다. 하늘은 검푸른색으로 덮여있고 화면 왼쪽 상단의 계단으로부터 그 밑으로는 이미 절명한 시체들로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화면 오른쪽 아래 모퉁이에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신음이 들리는 듯 목이 뒤로 젖혀져 있거나 웅크린 사람들이 있다. 거리를 감싸는 공기는 불쾌한 어둠으로 내려앉아 있으며, 이미 죽은 사람들의 부패와 죽음의 냄새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다만 천사의 날개가 희고 밝게 보이는데 이것은 들로네가 화면에 배치해 놓은 고전적 수법, 즉 중심의 강조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들로네의 이탈리아 유학과 이 빛은 무관하지 않다. 


1856년 들로네는 로마상 그랑프리의 부상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았으나 라파엘로의 완벽주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벽화 작업에 몰두하는데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그의 고향 낭트의 ‘성 니콜라스 교회’의 벽화에 그의 걸작들을 남기게 된다. 


그가 만년에 시작한 Jacques-Germain Soufflot(쟈크 제르맹 수플로)가 설계한 파리 팡테옹(처음에는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곧 세속적으로 사용된 건물로서 이탈리아의 판테온을 모티브로 삼아 설계된 건축물)의 벽화 ‘Life of St. Genevieve (성 쥐네브의 삶)’는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장자 이야기

혼돈의 논리와 자연의 질서


시작이 있으면 그 앞에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있고, 또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의 이전’이 있다. ‘있다’가 있고, ‘없다’가 있으면, 그 앞에 ‘있다 없다의 이전’이 있고, 또그 앞에 ‘있다 없다 이전의 이전’이 있다. 갑자기 ‘있다 없다’의 대립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있다 없다’의 대립은 어느 쪽이 ‘있다’이고 어느 쪽이 ‘없다’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이미 뭔가를 말했지만,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뭔가를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금강 반야 바라밀경의 내용을 보는듯하다. 無無明 亦無無明盡(무무명 역무 무명진), 무명이 없고 또 그 무명이 다함이 없다. 무명이란 밝지 않음이니 어둡다는 뜻이다. 어둠이 다하고 또 그 다함 조차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밝은 것도 또 밝지 않은 것도 아닌 밝음과 어둠의 개념 이전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원성과 그 이전에 대한 설정이다. 존재 이전의 상태, 그리고 그 상태 이전의 상황에 대한 장자적 설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장자는 그것을 혼돈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천하에 짐승의 가을철 터럭 끝보다 더 큰 것은 없고, 태산은 작다. 요절한 아이보다 더 장수한 삶은 없고, 팽조는 요절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겼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 이미 하나인 이상,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라고 말한 이상, 이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나와 그것의 말(언표, 기표)은 둘이 되고, 둘과 하나는 셋이 된다. 이렇게 계속하면 빼어난 산술가라도 답을 얻을 수 없거늘, 어찌 일반 사람이 셈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무에서 유로 나아갔어도 셋에 이르렀거늘 하물며 유에서 유로 나아감에랴?(기의) 그러니 더 나아가지 말고 오직 자연의 도를 따를 뿐이다.


장자는 언제나 기존의 벽을 허물고 격파하려 한다. 이미 형성된 그 어떤 가치나 형식도 장자적 도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가치로부터 벗어나거나 아니면 그 가치를 허물어야 한다. 크다와 작다의 의미로부터 장수와 요절의 의미까지 우리가 이미 체득한 모든 사실을 의심하고 동시에 부수는 일이 없이는 도에 이를 수 없는 것임을 장자는 강조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는 이와 같아서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기준으로 함부로 해석되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가치질서와도 무관한 상태임을 장자는 대단히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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