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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Dec 19. 2017

『장자』외편(제12편) 천지 (1)

천지(天地) 1


“대저 道란 만물을 덮어 주고 실어 주는 것이다. 넓고도 크다. 군자는 사심을 버려야 한다. 無爲로 행하는 것을 天이라 말한다. 無爲로 말하는 것을 일러 德이라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해 주는 것을 仁이라 말한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보는 것을 일러 大라 하고, 행동을 표 나게 다르게 하지 않는 것을 寬이라 하고 만 가지 다른 것을 모두 갖추는 것을 富라 한다. 그 때문에 덕을 굳게 잡는 것을 紀라 하고 덕을 이루는 것을 立이라 하고 도를 따르는 것을 備라 하고 외물로 뜻을 좌절시키지 않는 것을 完이라”(夫子 曰 夫道 覆載萬物者也 洋洋乎大哉 君子 不可以不刳心焉無爲爲之 之謂天 無爲言之 之謂德 愛人利物 之謂仁 不同同之 之謂大 行不崖異 之謂寬 有萬不同 之謂富 故執德 之謂紀 德成 之謂立 循於道 之謂備 不以物挫志 之謂完)


이건 분명 ‘장자’의 의도가 아니다. 아니 ‘장자’ 방식이 아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군자라는 말은 유가의 전유물이다. 더불어 그 군자가 가져야 할 天, 德, 仁, 大, 寬, 富, 紀, 立, 備, 完 이 열 가지를 열거하면서 이렇게 세부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단적으로 ‘장자’ 스타일이 아니다. ‘장자’! 그는 무용의 도를 이야기하고, 도를 넘는 도를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상식을 넘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획득된 것조차도 넘는 초월의 경지를 즐곧 내편에서 이야기해왔다. 그런 그가 여기서처럼 ‘뭐는 뭐다’라는 식의 설명형의 유가적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그래서 모든 학자들은 이 천지 편이 ‘장자’ 사후 도교가 성립되면서 필요에 의해 유가적 입장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열 개의 키워드가 가지는 함의를 좀 더 자세히 풀이해보면 얼마나 '장자'의 주장과 많이 어긋나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먼저 天은 ‘장자’적 태도와 거의 유사하다. 무위의 태도가 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별 무리가 없다. 내편에서 하늘이라는 대상에 대한 ‘장자’의 태도와 무위의 태도와는 매우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천을 무위와 완전히 등치 시키는 것은 약간의 주저함이 있다. 


두 번째 키워드인 德을 무위로 풀어내는 것 또한 별 무리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내편 德充符에서 ‘장자’의 덕에 대한 해석은 道를 체득한 人物의 內面이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 혹은 형상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천지에서 말하는 덕의 해석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仁이라는 말은 내편의 전체 내용을 보아도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인 데다가 '유가'에서 仁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堯임금, 허유 등을 '장자'는 내편 내내 人爲의 대표적 사례로 깎아내린 대상이었다. 그런데 문득 仁을 들먹이며 남을 이롭게 해 준다는 다소 뜬금없는 설명으로 이야기한다. 내편에서 우리가 만난 장자적 입장으로 유추해본다면 남을 이롭게 한다는 말 자체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장자'의 주장과는 전혀 맞지 않은 개념이 분명하다. 도대체 남은 누구이며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이롭게 한다는 것인가? 『장자』내편 두 번째, 제물론에서 남곽자기는 자신을 잃어(吾喪我) 나와 남의 경계를 잃었고, 또 인간세에서 누군가 또는 특정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안회의 행동을 ‘齋戒(재계)’하라며 '공자'의 이름을 빌려 말리던 '장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大 또한 '장자'의 의견과는 너무 멀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유가' 특유의 계층과 계급 개념이 숨어있다. 쉽게 말하면 각각의 물건, 혹은 사람들을 통제하는 상위의 개념을 염두하고 이것을 '크다(大)'라는 말로 대체한 것이다. 이를테면 왕이나 지배자의 견지에서 자신의 밑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같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 말로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것은 '장자'가 가장 혐오하는 인위의 전형에 가깝다.


寬 또한 유교적 정치이념의 표상이 될 만한 말이다. '너그럽다', '넓다', '온후하다'는 것은 유교적 왕도정치의 이상이다.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정치를 베푼 대표적 인물이 앞서 언급했던 요임금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 요임금을 내편 곳곳에서 인위의 표상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 요임금의 스승 격인 허유조차도 비난했다. 그러니 寬 또한 '장자'의 의견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장자'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이 편에서 부를 有萬不同이라 해석한다. 즉, 만 가지 다른 것을 모두 갖추는 것이라고 풀이해보면 '장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위와 정 반대쪽에 있는 것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紀는 법도인데 이 또한 '장자'가 가장 혐오하는 인위의 표본 중 하나이다. 묶어둔다는 말에서 벌써 장자적 사유와 만리 이상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立은 '공자'의 말, 즉 '논어' '위정' 편에 ‘삼십’을 '而立'이라 했다는 의미와 전혀 다르지 않다. 備를 모든 사물에 대응함이 완비됨으로 풀이되는데 이는 비어있음과 여유로움,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함을 주요한 가치로 삼는 '장자'의 이야기보다는 불교의 연기에 바탕을 둔 윤회전생의 개념에 더 적합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完을 말하면서 '외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외부에 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부에서 기인되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말함인데 이것이 내부의 변화를 막거나 그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장자'의 견해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고 유가 그리고 불교의 교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약간씩 존재한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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