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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Dec 31. 2017

2017. 12. 31. 오전


1.    終焉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우주의 운행에 따르는 지극히 타당한 결과로써 인간인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들은(심지어 자신들이 설정해 놓았으면서) 그 설정에 뭔가 또 다른 의미를 두려고 애를 쓴다. 송년 모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애써 의미를 두려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미 없다는 것의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무의미의 분명한 주체는 오직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에 있어 의미라는 것은 대부분 무의미의 반증일 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거의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든 의미를 두려고 노력하다 보니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할 것에도 의미를 두게 된다. 그냥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들이 사실은 더 많다.(장자적 관점으로 이야기한다면 在宥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다. 우리의 입이나 글, 또는 우리의 작위적인 것으로부터 내버려 둠으로써 오히려 더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한데도 이것을 무시하거나 혹은 외면하고 끝없이 의미 부여에 애를 쓴다. 


이러한 과정 전반에 인간이 가진 욕망과 집착이 개입되는데, 대부분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욕망과 집착이 가지는 부정적인 면을 감추기 위해 미화되곤 한다. 간혹 적극적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미화의 방법은 지극히 교묘하고 다양하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다만 그 경계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늘 우리는 그 과정을 겪어왔고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그런 일들 중 하나다. 새롭게 시작하는 관계가 있으면 반드시 끝으로 진행되는 관계도 있다.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스스로 알게 된 것은 끝내야 하는 관계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적극적인 의지의 개입을 통해서 관계를 종식시킬 필요도 가끔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지나치고 너절한 감정 소비를 하는 관계는 2017년을 기해 단절하고자 한다. 이기적이고 얄팍하지만 때론 이기적인 결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하여 회복된 나의 에너지는 유지되어야 할 관계에 좀 더 집중하고 또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동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2.    검은 구슬


장자 外篇 다섯 번째 천지의 제4장은 검은 구슬(玄珠) 이야기다.


“황제가 赤水(적수)의 북쪽에서 노닐다가 곤륜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고, 돌아오다가 검은 구슬을 잃어버렸다.(黃帝 遊乎 赤水之北 登乎崑崙之丘 而 南望 還歸 遺其 玄珠)”


여기서 검은 구슬이라 함은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체로‘무위자연의 도’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 현은 검다는 뜻으로서 北쪽을 상징하고 고요함(靜)을 상징하며 침묵(黙)을 상징한다. 고요함이란 처음부터 어떤 소리도 나지 않음이다. 즉, 소리의 원인도 과정도 없는 상태로서 그 자체로 완전함이다. 한편 침묵은 이미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멈추고 다시 본래의 고요(靜)로 돌아간 상태다. 하지만 여건이 조성되면 언제든 소리가 날 수 있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고요함과 침묵은 구별되어야 한다. 어쨌거나 황제는 이 검은 구슬을 잃어버렸다. 이를테면 고요함을 잃고 침묵조차 깨진 번잡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道를 잃어버린 것이다.


“知에게 명령하여 구슬을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離朱(이주)에게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喫詬(계구) 에게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했다.(使知 索之而不得 使 離朱 索之而不得 使 喫詬 索之而不得也)”


황제는 다급해졌다. 먼저知에게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알다시피 지의 요체는 지식이다. 지식으로 도를 찾는다는 것이 가능한 말인가? 지가 찾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황제는 이내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이주(눈 밝은 사람 - 백 보 밖에서도 능히 추호지말(秋毫之末 – 가을철 짐승의 털 끝)을 분간했다고 한다.)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력으로 잃어버린 도를 찾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는 다급해진다. 이번에는喫詬(계구)에게 이 일을 부탁한다. 계구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두고는 여러 학설이 있다. 먼저 辯舌(변설)이 뛰어난 것을 擬人化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황제 때의 발이 빠른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고 힘이 센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당나라 때 成玄英의 疏(소-참고서)의 ‘言辯也’라는 주석이 通說이다. 즉 말 잘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당연하지만 道를 말 잘하는 사람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장자』 전체를 통해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장자’와 ‘혜시’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언변은 道와 거리가 조금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象罔(상망)에게 찾게 하였더니 象罔이 그것을 찾아왔다. 황제는 말했다. “이상한 일이구나. 결국 象罔이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니.(乃使 象罔, 象罔 得之 黃帝曰 異哉 象罔乃可以得之乎)”


마침내 황제는 상망에게 부탁한다. 상망이 누군가? 상망은 형체(象)가 없다(罔-‘아니다’라는 부정의 의미가 있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수행자가 마침내 이른 경지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道 자체를 달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상망을 좀 더 자세하게 풀이하면 ‘形體를 갖지 않고, 人間의 감각이나 지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니 이것은 곧 道를 말함이다. 결국 도를 통해 도를 찾았다는 말이며 더불어 도의 경지에서 도가 보이는 것이다라는 함의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황제가 잃어버린 道(玄珠)는 道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마지막 부분에 황제의 의심이 있다. 어찌하여 道는 道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의 의심도 여기에 걸려 있다.


2018년에도 이 의심에 매달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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