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보는 죽음.
최근 여러 사람들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여러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을 정리해 본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왜냐 하면 이런저런 생각이 아직은 내 머리를 덜 복잡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여름 새벽은 그래도 여름날 중 그나마 깊게 내려앉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앉아 삶의 또 다른 모습인 죽음을 생각해본다. 죽음이란 역시 삶의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음습하거나 무섭거나 피해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은 내 삶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정지되는, 그리고 마침내 나의 그 어떤 것도 남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에 애써 피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여기에는 살아 존재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나의 삶도 결국 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 서면 돌연 죽음이란 것조차도 삶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태일 뿐이다. 내가 살아왔던 매 순간, 오로지 나만 가졌던 욕망이나 희망, 또는 간절함이 죽음이라는 사태 앞에 종결될 뿐, 나 외의 모든 것은 사실 그대로 전혀 변함없이 유지되고 또 진행되어져 갈 것이다. 실제로 그 상황을 타인의 죽음을 통해 늘 확인하고 있다. 어떤 죽음의 기억도 시간 앞에서는 소멸해가는 것을!
죽음이라는 단어를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나의 세계가 종결된다는 것 외에도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의 단절이며 종결이라는 것인데, 그 단절과 종결은 지상에 “나”의 공간이 완벽한 공백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떤 절대적, 공간적 점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죽음이 공백이라고 보는 것도 사실은 논리의 무리가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이란 단 하나의 공간도 점유할 수 없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자연의 변화, 즉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몰락과 탄생의 과정 속에 단지 내가 존재하고 또 사라져 가는 이 절대적 순환 속에서 나의 죽음은 그 불변하는 진리의 증거이며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은 하나의 사태일 뿐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로 진입하는 그런 사건이 아니라 다만 “존재한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단순하지만 완벽한 논리의 유일한 증거일 뿐이다.
나의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 나 역시 두려움과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나 역시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이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가지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듯 이런 새벽, 나와 죽음에 대한 생각의 정립을 통해 더욱 단단한 삶을 유지하는 한 편 문득 내 앞에 죽음이 다가왔을 때, 평소 생각한 것처럼 좀 더 당당하고 좀 더 유연하게 그 사태(죽음)를 받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또한 살아있는 자의 욕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