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배 위에만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일가족인 듯 보이지만 일가족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구성이 애매한 면이 있다. 한 명의 남자는 선채로 배의 돛대를 잡고 돌아서 있고 다른 한 명의 남자는 모자를 쓴 채 앉아있지만 뭔가 어두운 느낌을 준다. 그 옆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얼굴을 제외한 온몸을 감싼 여인이 있다.
반대편에는 이들과는 사뭇 다른 자세로 앉아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칙칙하여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그림의 제목은 La Mal'aria (말라리아)인데 모기에 의해 옮겨지는 바로 그 전염병을 말한다.
이 그림을 그린 에르네 에베르(Ernest Hébert 1817~1908) 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Grenoble)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률 공부를 위해 파리로 왔지만 그는 곧 위대한 조각가 David d'Angers(다비드 당제)와 역사화가 Paul Delaroche(폴 드 라로쉬)의 교육과 영향으로 화가가 된다.
그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예술상으로 불렸던 로마대상(Grand Prixde Rome)을 수상하여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예술을 깊이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미학이 느껴지는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19세기 상류층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19세기 말 공화정과 왕정복고를 반복하던 프랑스 민중의 삶은 피폐,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아프리카에서 세력 확장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결과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프랑스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의 풍토병에 가까웠던 말라리아가 프랑스에도 창궐하게 된다. 현재의 프랑스도 이민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아니 유럽 전체가 이민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 그런데 이민문제는 모두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앞선다. 왜냐하면 현재 유럽의 18~19세기 조상들이 지금 이민, 혹은 난민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들의 영토에 가서 한 일을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고통 주었으면 고통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참담하고 어두운 세계를 낭만적 분위기와 고전적 터치로 그린 이 풍경은, 그림의 소재와 주제에서 오는 슬픔과 우울의 느낌을 받는 동시에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는 고전의 견고한 구도와 색채의 두터움을 동시에 느끼는 상반된 경험을 하게 한다. 이 그림에서도 프랑스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인물이 세 명이나 등장하는데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의 양쪽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북 아프리카 이주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에베르는 드물게 매우 장수하며 살아 영광을 누린 흔치 않은 예술가인데 1867년과 1885년경 두 차례에 걸쳐 Académie de France à Rome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08년 9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중에는 “La Servante du Harem, 1874 (하렘의 여시종)”을 그린 École de Barbizon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 Paul Trouillebert (폴 트루이베르, 1829~1900)가 있다.
장자 사상의 중심은 무위자연, 즉 ‘무’에집중한다. ‘무’의 세계에 이르고 그리하여 도(道)에 다가가려는 인간들은 자신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의 흐름, 즉 과거에서 시작되어 미래로 흘러가는 변함없는 시간의 연속 선위에 있는 자신을 볼 때, 스스로 작고 초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무한하다’고 규정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지극히 거대한 세계 속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정말 미미한 우리는 조금이나마 남보다 나아 보이기 위해 남을 이기고 자신이 승리하고자 기를 쓰고 또 노력한다.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불안과 열등감, 막상 이기고 난 뒤에 찾아오는 자신 속의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러한 긴장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문득, 맹렬하게 승리를 위해 나아가는 자신이 어느 날 아무것도 아님을 느낄 때가 있다. 바로 그때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증명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더욱 더 밖으로 나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고, 또 다른 길은 그 모든 외부적인 것을 거두고 자신의 안으로 돌아와 마침내 자신이 어느 누구도 아님을 깨닫는 방법이다.
자신의 밖으로 나가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존재 자체를 거의 증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증명의 필요성만 지속적으로 증가할 뿐, 증명의 길은 멀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를 남의 입맛에 맞게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증가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부족하지 않은 체 하며,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잘못하지 않은 체 하는 자신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길은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어느 누구도 아님을 깨달음으로서 비로소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증명하여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