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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01. 2016

세 개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

감정과 마주하기

1.    분노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답답함이요, 내 존재의 괴멸을 보는 참담함이다. 타인으로부터 좀 더 온당하고 타당한 대우를 받으려는 욕망의 반사이며, 균형이 무너진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다만 안정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껏 내가 가져왔던 가치관에 대한 스스로의 부정이며, 연이은 타인의 부정에 대한 여유 없는 건조한 대응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가볍게 처우했던 스스로의 불만이거나, 또는 그 뒤의 한 없는 추락의 느낌에 대한 졸렬한 보상일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무섭게 매끈하며 냉정하고 그래서 더욱 날카롭다. 내 분노의 불길은 나의 내부로부터 발생하여 나의 외부로 번져 외부를 그을리게 하고 그 뜨거운 불길은 다시 내부로 향한다.  매운 연기는 온몸으로 퍼져 독이 되고, 독에 취해 지친 내부는 또 새로운 분노를 만들어 낸다. 


하여 결국 분노는 내 몫이다. 그리고 나의 완벽한 그림자이다.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실체이며, 동시에 한 없이 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2.    사소함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밤이 되어 감는 온전한 하루 속에서, 순차적으로 늘어서 있는 조각조각의 그 미세한 부분이 직선으로 또는 곡선으로 중첩되어 “삶”이 된다면 어쩌면 그것은 내 의지와 무관한 결과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의지의 작용점이 미치는 내 삶의 부분은 거의 없거나 혹은 몇 군데에 불과하지만, 나는 변함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이곳에서 또는 저곳에서 반복적으로 차에 키를 꽂고 운전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나와 늘 완벽한 대칭 속에 있는 사물들과, 그리고 그 사이를 절묘하게 관통하고 있는 시간의 간섭을 받으며 그 모든 것들과 묵시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3.    그리움


불교에서 말하는 내생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다양하여 몇 시간 아니 며칠을 이야기해도 다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삼천 대천세계에서 금생에 만난 인연이 내생에 만날 확률은 만겁 동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사정이 이러한데 내생을 이야기하고 그 불가능함에 의존하고 싶어 진다. 이 얼마나 간절함인가! 하지만 이 마음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육신의 욕망이 교차하고 그 욕망을 교묘하게 포장하려는 의도들이 날실 씨실로 엮여서 본래 마음의 주인인 나를 속이려 한다. 


어디 그뿐이랴 거기에는 나의 이기심과 나의 분별심과 말랑한 연질의 각종 감각들이 뒤섞여 실체도 아닌 그렇다고 허상도 아닌 그 어떤 것을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막상 이러한 분석조차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내면에 무수히 떠도는 이 많은 생각의 가닥들은 실상 한 개의 생각으로부터 뻗어 나온, 그러니까 한 곳으로 쉽게 모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늘 그렇듯이 일정한 조건만 형성되면 그 많은 생각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단순화되며 집중된다. 그 뒤 자연스럽게 판단력을 잃게 되고 본인조차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그러한 일은 가속도가 붙어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면 오래지 않아 거기에는 ‘합리화’라는 괴물이 문득 등장하고, 그 괴물은 모든 가치를 均質化 시키는 독액을 뿜어댄다.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만 말하고 행동하며 그것이 필연이라고 생각되게 하는 중독에 도달하여 마침내 일반 의지는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도 않고 또 여러 가지 조력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오직 스스로의 의지, 그것도 단기간의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도달한다. 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한 예측도 어렵고 동시에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름밤이 되면 야간 유도등에 많은 벌레들이 모여든다. 하루살이 종류와 풍뎅이 종류 등 주광성 벌레들은 불을 보고 본능에 따라 모여든다. 대개는 거기서 그들의 생을 마감한다.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범위에서 본다면 딱히 안타까울 일도 아니며 실제 인간인 우리에게는 별 비극적 사태는 아니다. 


단지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빛에 대한 끌림에 대해 우리의 삶을 투영시켜 보면서 인간인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또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함에 ‘야간 유도등’이라는 말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빛이란 어둠을 밝히는 존재이며 희망의 징표이며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그 빛이 늘 그 빛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아니 빛을 가장한 빛, 빛과 유사한 그 무엇이 문제다. 


벌레들에게 야간 유도등의 빛은 빛이지만 죽음을 부르는 빛이요, 모든 것을 앗아가는 파멸의 빛이다. 인간에게 야간 유도등은 없는가? 인간을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빛, 본래 빛을 가장한 빛들, 인간의 본능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빛들. 야간 유도등도 벌레를 지배하려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인간을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모는 야간 유도등도 분명히 존재한다. 거기에서 나오는 빛은 인간들이 인간들을 지배할 의도로 만든 빛이므로 최소한의 분별력만 존재한다면 어쩌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너무 강한 유혹에 끌리는 인간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스스로 만드는 빛, 스스로 걸어놓은 야간 유도등이다. 내 속에 늘 켜지는 야간 유도등 은어 찌 할 것인가? 


내가 살다 왔을 전생의 그 어는 세계에서 인연을 맺어오다 다시 이생에서 인연의 그림자를 보게 되니 그로부터 8만 4천의 번뇌가 생기고 또 다른 업장이 생겨 한 없이 윤회의 길로 들어선다. 무간지옥으로부터 비비상천까지 육도를 전전하며 이 인연의 업이 다하도록 살아야 하니 해탈은 멀고 수미산은 광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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