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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r 20. 2018

John Carter of Mars

2012년 개봉

Tarzan의 작가이자 과학 픽션의 대가인 Edgar Rice Burroughs(애드거 라이스 버로스, 1875-1950)가 1912년 연재소설로 발표한 “John Carter of Mars(화성의 존 카터)”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동시에 온전한 개인적 상상의 세계였던 것이 이렇게 영화화된 것에 약간의 공허함 같은 것도 있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려 시도했지만 소설의 엄청난 스케일과 규모, 그리고 나와 같은 개인적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모두 중도에서 그만두었을 정도로 이 소설은 범우주적이면서 동시에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유명한 천문학자 Carl Sagan(칼 세이건, 1934-1996) 에게 영감을 준 이 소설은 1912년 발표되었으니 100년이 넘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나 작가의 우주적 관점은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기발한 과학적 또는 우주적 아이디어가 소설에 담겨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지금껏 많은 서양 사람들에게 이 책이 널리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소설 발표 백 년을 기념하여 마침내 영화로 만드는 것에 성공하였지만 영화는 소설과 달리 엉성한 부분이 꽤나 있다. 어쩌면 디즈니 영화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엉성한 사랑 이야기 

존 카터

존 카터(테일러 키취 분)의 우주로의 여정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SF 장르의 영화들이 모두 이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니 주인공인 존 카터는 그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을 한꺼번에 보는 듯하다.  


소설은 먼저 쓰여졌지만 영화는 뒤에 만들어졌으니 역으로 주인공 존 카터의 캐릭터는 이미 세상에 나온 SF영화의 여러 주인공들과 비교가 된다. 영웅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모습, 거기에다 약간의 페이소스가 있는 그의 캐릭터는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 스타워즈의 “아나킨”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 카터는 셜리 보다는 덜 용감하고 아나킨에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페이소스가 없으니 주인공으로서의 존재감은 사실 앞의 두 영화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복잡한 존 카터의 심경의 변화, 즉 가족을 잃고 황금을 찾아 유랑하는 것에서부터 황량한 바숨(화성)에서의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런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데자

여자 주인공인 데자 토리스 공주(린 콜린스 분)의 모습은 이전 SF 영화의 여 주인공들이 가진 매력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는 느낌을 준다. 아바타의 “네이티리”가 가지는 강인한 모습이나 스타워즈의 “아미달라” 여왕에게서 느낄 수 있는 현명하고 독특한 아우라는 “데자”에게는 없다. 이 두 개의 모습을 모두 가진 여성으로 그리려 했으나 외계 종족 타르크족의 솔라(사만다 모튼 분)라는 역할의 등장으로 해서 오히려 그 이미지가 상쇄되는 느낌까지 받았다.  


또 “데자”와 “카터”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일으키는 과정의 서사는 평면적인 문자로 된 소설에 비해 입체적 영화에서 오히려 부족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감독의 역량 문제인지 또는 배우들의 덜 익은 연기 탓인지는 몰라도 감정이입이 없는 억지 설정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카터”와 “데자”의 사랑이야기인데 이 부분이 엉성해짐으로 해서 다른 영화적 시퀀스들이 위협을 받고 이것은 영화 전체적으로는 단지 원작의 이야기 조각들을 여기저기에 붙여 놓은 느낌마저 준다. 


상상, 그리고 비주얼 

상상의 화성

우리가 사는 행성, 지구는 태양계의 세 번째 별이고 화성은 바로 그다음 별이다. 약 7천5백만 Km가 떨어진 그 별에 오래전부터 인류는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최근에는 여러 번 탐사 위성을 보냈다. 우주 어딘가 생명체가 살기를 바라는 희망을 인류는 가까운 별 화성에서 찾으려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이러한 과학적 바탕으로서의 화성에다가 영화 “소스코드(Source Code, 2011)”에 등장하는 평행우주론이나 미국 드라마 “프린지”의 동일 공간 다차원의 세계관이 부가되어 우리의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한계까지 마음껏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물론 그 공로의 대부분은 원작자의 것이지만 이러한 상상의 공간을 실사로 보여주는 영화의 비주얼은 내용보다는 확실히 인상적이기는 하다. 버로스의 표현이 이제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화성 “스페이스 쉽”의 특이한 모양이나 운명의 여신 “이수스”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기괴한 협곡의 장면, 타르크와 바숨의 경이롭고 신기한 건축물 등은 상상과 과학이 혼재된 비주얼이다.

 

또 다른 상상 


SF영화에서 깊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며 2시간 정도의 오락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또한 별 다른 이견이 없다. 이 영화도 그런 판단에 부합하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 영화를 보면 제법 생각해 볼만한 소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타르크족”의 종족번식의 방법에서 우리는 다가올 미래사회 그 언젠가 인류 또한 저런 방식을 취하게 될 것 같은 좋지 못한 느낌을 받게 된다. 부모 없는 공동 번식의 사회에서 역으로 부녀관계를 확인하는 타스 타르 가스(월리엄 데포 분)와 솔라의 유대는 황당하거나 혹은 엉뚱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혈연이나 가족의 본질에 대한 모호한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한다.  

테른 족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테른족”의 등장도 이채롭다. 하기야 영화에서 선악이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가? 하지만 주인공을 선이라 하고 그 반대편을 악으로 하는 일반론으로 볼 때 이들, “테른족”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테른” 족은 바숨의 신인 “이수스”의 전령들이다. 그러니까 신의 사자들인 셈인데 이들의 행보는 참으로 이기적이며 無目的 적이다. 영생을 하는 종족들치고는 세상에 대한 욕심이 그렇지 못한 존재들보다 지나치다는 설정이 언뜻 지구의 종교적 상황, 종교집단의 아집과 욕심에 연결시킨다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언제나 약간 허전하다. 2편을 약속하지 않는 분위기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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