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邊虛空覺所顯發

일요일 아침의 명상

by 김준식
이 또한 찰나인 것을!
돌처럼 굳어진 진리와 허접한 플라스틱등
번뇌무진서원도
호랑이도 웃을 일인가?

1. 부처님 오신 날


다음 주 화요일은 음력으로 사월 팔일 부처님께서 2562년 전 태어나신 날이다. 그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여래(如來 – 부처를 부르는 열 개의 이름 중 하나)가 되었고 또. 그 깨달음의 법을 설하여 인류의 대 스승이 되었는데 이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전히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부처는 수많은 방편(方便, 산스크리트어 upaya)을 통해 그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방편이란 편리하고 교묘한 방법이란 말로서 중생의 근기(根機- 수준)에 맞게 여러 가지 대안으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각자의 상황과 기질에 맞는 최선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접근하다’, ‘도달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아무리 방편을 사용하여 설명해도 깨달음이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지임이 분명하다. 더불어 너무 방편을 많이 시용하다 보니 방편이 본질을 가려 이제는 방편과 본질을 구분하기조차 애매해졌다. 어쨌거나 부처의 절대 경지는 우리의 의식 수준으로 따라잡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깨달음의 요체가 무엇이든 간에 부처가 깨닫는 순간은 범 우주적 사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시공간에서 인간의 사고 능력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에서 아직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가 없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부처의 깨달음은 우주적 사건에 비견될 만하다.


화엄경 적멸 도량회 제 1 품에 따르면 부처의 깨달음이 있던 그 순간 삼천 대천 세계가 모두 그 경지를 찬탄했다고 되어 있는데 삼천 대천 세계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 즉 태양계와 같은 규모의 세계가 천 개 정도 모인 것을 소천(은하)이라 하고, 그것이 다시 천 개 정도를 중천(은하계)이라 하며 또 그것이 천 개 정도 모이면 대천이 되는데, 이것은 현대적 의미로 우주를 뜻하는 말이다. 다시 그것이 삼천 개 정도 모이니 현재 확장하고 있는 우주와 흡사한 규모가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삼천 대천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 경전 이전에 브라만교의 고대 경전인 베다에서도 발견되는 이야기이므로 고대 인도의 범 우주적 세계관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어쨌거나 우주적 사건인 깨달음이 있고 그것이 발현되는 과정은 우주적 판타지 소설처럼 화엄경에 묘사되어 있다.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이며 극적인 정신적 사태를 불교에서는 형상화하여 바이로차나(비로자나불)라고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하면 법신이라 표기한다.(이 비로자나불이 있는 절 건물은 대부분 비로전인데 그 건물이 중심 건물이 되면 그 건물의 이름은 대적광전 <해인사가 대표적>이 된다.)


법신이 태 허공(우주)에 빛을 뿜으면 삼천 대천 세계에 존재하고 있던 보살(菩薩)들이 일제히 법신(바이로차나)에게 다가온다. (마치 예수가 탄생한 순간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었던 것처럼)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로서, 산스크리트어 보디 사뜨 바(Bodhisattva)를 음(音) 역한 것으로 보디 Bodhi와 sattva 사트바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리, 즉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의미하며, 살타, 즉 사트바(sattva)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으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보리살타는 깨달음과 중생을 합친 개념이다.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생명체’란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우주적인 사건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부처의 탄생이란 매우 의미가 있는 날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이 땅의 절 집 마당은 곧 다가올 부처님 생일을 맞이할 준비로 한창이다. 조잡한 색깔의 플라스틱 연등은 늘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나를 막는다. 절에 가서 등을 다는 것은 부처님 시절 빈자일등의 유래가 말하듯 세상을 밝히는 상징성과 覺者에 대한 공경의 의미로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세월이 2600여 년이 지난 지금, 부처에게 올려져야 할 그 등불은 금액으로 차별되어 규모와 밝기가 달라진다. 더불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은 그 자본에 마음을 빼앗겼다. 깨달음이란 우주적 사건의 주인공이신 부처님께서는 아마도 자신의 생일날, 하루 내내 먹물 옷 입은 사기꾼 혹은 장사꾼들의 바람잡이 역할을 하셔야 될 판이다.


절 입구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조악하고 허접한 플라스틱 등이 경건하고 엄숙한 절 집을 마치 유령의 집처럼, 서낭당처럼 만들었다. 이런 일을 비롯해서 나는 늘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순 덩어리의 행위들을 듣고 또 본다. 지금 저 색색의 플라스틱 등의 실체가 어쩌면 바로 그 밑에 드리워진 검은색 그림자인 것을 우리 모두는 모르고 있는 것인가?


2. 토요일 하루


아침나절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산을 걸었다. 산은, 아니 자연은 언제나 정답이다. 산을 내려오니 비가 굵어진다.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산에서 푼다. 육체적 피로는 이렇게 풀 수 있지만 마음으로 다가오는 무력감과 무료함은 어찌할 것인가? 하여 방편을 생각해본다.


무료해지고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근원에 대한 생각이다. 내 삶의 근원이래야 작은 옹달샘처럼 미미한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십몇 년, 이곳저곳의 물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물’이란 존재는 나의 영혼과 육체를 망라하는 말이자 동시에 그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그 모든 것들의 反映들이다.


물은 흐름이다. 흐르는 것은 멈추지 않아야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멈추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잘 다져진 토대와 그 토대의 유지를 위한 시간성이다. 뿐만 아니라 흐름은 유동성을 담보로 한다. 즉, 어떤 것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으려는 물의 본성과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품어 낼 수 있는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어떤 모양과 틀에도 반드시 들어찰 수 있지만 스스로 그 어떤 형태로 귀결되지 않아야만 한다. 따라서 물은 ‘和而不同’ 그 자체여야만 한다.


하지만 유동성이 완벽해질수록 그 속성에 따르는 또 다른 문제가 새롭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로 停滯다. 정체란 유동성의 또 다른 면이다. 유동하여 움직이는 특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정체, 즉 고임이다. 출구가 없는 웅덩이에 갇힌 물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물이 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흐름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그 물이 고여 썩어간다는 것은 곧 내 의식과 사상, 그리고 일상이 고여 썩어 감이다. 출구가 없는 웅덩이에 고여 있다면 부패는 불가피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물은 그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정체와 부패에 이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의 모든 것의 반영을 비유한 대상으로서의 관념적인 물이라면 이 정체와 부패가 불가피하지만은 않다. 2600여 년 전 인도의 부처는 이 상황을 경험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그의 제자에게 설명하였다. 그 설명, 즉 마음의 정체와 부패를 극복하고 언제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의 본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설명해 놓은 경전이 우리가 잘 아는 대방광불 화엄경이다.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는 이 경전은 부처의 깨달음에 대한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설명으로 되어있는데 그 핵심은 ‘緣起와 圓融’으로 표현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정체는 그 원인이 몸과 마음에 있다. 즉, 몸과 마음의 정체를 일으키는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여 스스로 정체에 빠지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원인을 찾아내서 없애야 된다는 이야기다. 자명한 이야기여서 언뜻 쉬워 보이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그 ‘누구나’의 범위는 한 없이 좁다. 따라서 그 원인에 대한 접근방식과 논리는 여전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궁극의 세계일 수 있다. 꼭 부처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자구 노력을 해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 내내 이런 노력을 줄곧 기울여 왔고 가끔 봉착했던 수많은 정체에서 잘도 탈출했던 경험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정체와 그 부패는 바로 이 순간 영원처럼 깊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몸과 마음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다. 습기는 도처에 있고 빗물은 수직으로 간간히 떨어진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의 빗물조차 의미 없는 것은 없다. 나로부터 일어난 緣起는 저 빗물과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연결됨을 아는 순간, 물리적 나의 위치는 매우 복잡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저 빗물 위 구름, 그 위의 우주 공간을 생각해보니 무료함과 무의미함은 사라지고 절대적인 엄숙함과 지극한 삶의 한 장면과 마주하게 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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