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by 김준식

善, 그리고 惡


교사로서의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경력이 되고 보니, 학교 내부의 문제가 돌연 무가치하거나 혹은 매우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 우리 반 아이들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다.


어제 7교시, 올해로 경력 33년이 되시는 여 선생님께서 수업을 하시고 나와 거의 울먹이는 투로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2학년 4반 때문에 명퇴 고민이 되네요.”


우리 반 아이들이 뭔가 심한 충격을 준 모양이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충 수업 시간에 반장과 몇몇 학생을 불러 물어보니 그 여선생님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 반 28명 중, 반은 자고 반은 과자를 먹고 잡담을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일과 후에 그 문제의 과자 팀을 불렀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며 펄쩍 뛴다. 선생님께서 오버하시는 것이란다. 꼬깔콘 두어 개 먹다가 못 먹게 해서 조금 떠든 것뿐이란다. 할 말이 없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추궁해 본 들 소용이 없다.


주말 내내 그 꼬깔콘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더불어 그 아이들이 선과 악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서양적 사고에서의 善이란 사물에 완전히 혼융되어 있는 성질로서 ‘사고’와 ‘사유’의 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장에서 실천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自覺되는 것이다. 특정 행위는 많은 가능한 행위 가운데서 ‘즉시 이행하여야 할 것’으로서 선택되는데 이 선택의 근거가 바로 善이다. 그것은 유려하며 자유롭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적 사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만으로는 有用과 無用의 경계를 가지지 못하며 동시에 어떤 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없어 보인다. 공맹을 위시한 유가 철학은 그래도 유무용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장자에게는 유무용의 구분 자체가 이미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惡은 무엇인가? 한자 자체로는 亞 + 心으로서 ‘마음이 답답하거나 보기 좋지 않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서양에서 惡의 본질론은 매우 복잡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논리로 본다면 絶代善인 창조주가 창조한 세계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惡이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을 중세의 교부들은 창조의 과정에 개입된 질료의 개념으로 기묘하게 풀이하려 하지만 결국 완전히 얽혀 버리고 만다. 근세 니체(Nietzsche, 1844 ~ 1900)에 와서 위버 맨 슈(Übermensch, 초인)의 개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여 저 유명한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 악의 존재성과 당위성을 설명하지만 어차피 이원적 세계관의 큰 맹점을 감 출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 동양에서는 선과 악을 인간의 내부의 문제로 본다. 즉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두 개의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학설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양심’과 ‘방심’이라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 ‘양심’은 나 외의 모든 다른 존재와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배려하는 의지이며, ‘방심’은 나 이외의 모든 사물을 움직여 오로지 나의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려는 의지이다. 맹자는 ‘양심’에 중점을 두고,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순자는 ‘방심’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두 논리는 인간을 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즉, 순자의 성악설과 맹자의 성선설의 인간에 대한 관점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불교에서도 선악을 인간 내부의 문제로 본다. 선행과 악행은 인과 법칙에 의해서 현세에서의 과보(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낳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런 상대적 구별을 초월하고 있다. 궁극적 인간 본성인 ‘불성’은 선인에도 악인에게도 있다. 단지 미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불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선행과 악행을 반복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선악의 구별을 초월한 인간의 궁극적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꼬깔콘 먹은 아이들은 서양식으로 본다면 창조주에 위배되는 무언가가 있고, 동양식으로 본다면 순자의 '방심'이 그들 마음에 있기 때문인데 월요일 이들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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