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보내며

by 김준식

1.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은 게임 이론에서 경쟁자가 각자의 대응원칙에 따라 서로의 최선의 선택을 하면 서로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거나 혹은 바꾸지 않으려는(의지가 개입되는) 균형 상태를 말한다. 위대한 수학자 존 내쉬가 고안한 이론이다. 내쉬 균형은 상대방이 현재 전략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도 현재 전략을 바꿀 유도 원인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알기 쉽게 옮기자면 찜찜한 균형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6.13 지방선거는 여러 모로 이 균형과 닮아있다.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각자의 선택에 대하여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시하였고 그 상태에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선택의 당사자는 국민이 아니라 정치세력이고, 오히려 국민은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쉬 균형은 선거의 이면을 지배하고 있다.


2. 사전투표


사전 투표일이 끝났다. 본래 정한 투표일이 이제 삼일 남았다. 아마 내일부터 각 후보들은 사력을 다할 것이다. 두어 달 전부터 출근길 교차로에서 가벼운 인사로 시작한 선거운동이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데 요즘은 선거운동이 거의 광적인 분위기다. 아침저녁으로 이 풍경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해 본다.


오늘 아침 내가 본 풍경은 사실 전혀 새로운 풍경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아침 선거 운동원의 우아한 춤사위를 보면서 문득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단히 생경한 풍경처럼 느껴졌다. 선거 운동의 근본 목적은 후보자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지지의 바탕은 당연히 후보자 본인이 당선되었을 때 추진할 수 있는 공약이며 좀 더 나아가 소속 정당의 정강과 정치적 행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선거 분위기는 조금 방향이 달라 보인다.


시의원 후보들이 당선되면 당연히 시 의회 구성원이 된다. 시 의회에서 하는 일은 시정에 관한 조례의 제정이며 그 조례의 범위는 도 의회의 조례 범위 안에 있어야 하고 더불어 상위법인 각종 지방행정에 대한 법률 안에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그 권한의 범위가 넓지는 않다. 하지만 시의원의 선거 공보나 선거 운동 현장에서 그들이 외치는 것은 거의 국회의원 급이며 가끔은 대통령 급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시의원 후보자들의 우아한 손짓과 함께 선거운동원으로 고용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춤과 노래, 그리고 방송장비가 설치된 차량에서 보여주는 홍보비디오는 시의원의 범위를 분명히 넘은 것처럼 느껴진다. 시의원이 이러할 진데 도의원, 시장, 도지사, 교육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막상 그들이 당선되고 나면 그 거창하던 공약은 어디로 가고 “~ 그랬으면 좋겠다” 식의 허언이 되기 일쑤다.


선거가 대의민주주의의 꽃이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은 내가 처음 선거에 참여했던 시절부터 줄곧 가져온 의문이다. 구체적으로 반박할 자료나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선거가 대의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명제에 여전히 선뜻 100%의 동의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꽃이라는 것을 핵심이라고 치환할 수 있다면 선거야말로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은 여전히 국민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민의 의지로부터 제도적 장치가 발생되는데 그 구체적 제도가 선거라면 핵심이라기보다는 수단이라는 말이 조금 더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그 수단인 선거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적합한가의 문제도 여전히 제기되는데 언제나 비교형량의 법칙에 따라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명분으로 지금의 선거제도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선거는 국민의 의지를 왜곡하거나 糊塗(호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던 경우를 우리는 제법 경험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장래에 대한 기대도 낙관적이지는 않다.


3. 쓸모! 엉뚱한 생각(지방 선거 후보자들 선거공보를 보며)


오늘도 우리는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하였고, 또 그 결정에 따른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작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였을 것이며, 두 경우 모두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새로운 다짐 또한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각자 나이만큼 또 지식만큼 관행적으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미세한 일상일 수 있다.


이 일상의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생각은 쓰임새이다. 즉 필요한 무엇인가를 하고 필요한 무엇이 되고자 한다.(최소한 나의 경우에, 아마 다른 사람도 큰 예외는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파악조차 없었지만 거의 맹목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교육받아왔고 또 유지될 것이다.


장자 인간세편에 등장하는 장석과 남백자기, 그리고 형씨라는 인물들은 큰 나무가 크게 자란 것이 그 나무가 쓸모없는 나무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쓸모는 인간의 쓸모이다. 장자는 한 발 더 나아가 도대체 ‘인간의 쓸모’라는 것이 무엇에 쓸모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우리의 교육, 이를테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여러 면에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누구에게 쓸모 있어야 된다고 배운 적은 별로 없고, 다만 그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수 없이 세뇌되어 왔을 뿐이다. 그리고 늘 그 뒤에 이른 말이 따라붙었다. “올 바르게~”였다.


자! 그러면 그 쓸모의 주체가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국가라면 어느 나라인가? 자신의 나라에서 쓸모 있으면 모든 나라에 공히 그 쓸모가 있는 것이 되는가? 좀 더 범위를 확장하여 인류를 위해서 쓸모 있는 것은 또 어떤가? 인류를 위한 쓸모라면 모든 것이 절대적인 필요충분조건인가? 일찍이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 인류적 쓸모의 무가치성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그의 위대한 저서 “에티카”에 의하면 절대적 쓸모(즉 절대적인 善, 당시로서는 기독교의 논리 혹은 하나님)이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욕망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덕에 그는 파문까지 당했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대한 선각자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진리(실제로 진리인지는 알 수 없음)는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필요(쓸모)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극단적으로 어떤 대상에게 쓸모 있는 것은 동시에 또 다른 대상에게는 쓸모가 아니라 오히려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쓸모, 즉 유용한 것이 오로지 인간의 기준으로 한정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인간의 지성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즉 지성과 의지의 위계를 정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된다. 만약 지성이 우위라면 인류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철학적 종교적 기준으로 유용성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그 철학이나 종교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 즉 지역적, 문화적 차이와 시대적 공간적 차이가 개입한다면 이 문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인다. 그러나 이 유용성의 기준이 의지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의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을 有意(主意) 주의라 부른다. 유의 주의적 입장에서 유용성의 기준은 절대적 위치에 있는 존재의 일반의지(보편 의지 –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브 오캄에 의해 야기된 보편 논쟁에서 일컬어지는 보편; universals을 말한다.)이다. 중세 서양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이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으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즉 신의 지성(절대적)에 따라 신의 의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스피노자 등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거의 천년 동안 서양의 모든 것은 신의 지성과 의지였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것이 무너진 자리에 국가, 민족, 이념, 자본 등 모든 것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차용되었고 그 결과는 인간에게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왔고 그 재앙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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