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 부채

by 김준식

아마도 국민학교 2~3학년 이 맘 때쯤이었을 것이다. 선친께서 부르시더니


“얘야! 너도 제법 컸으니 고개 넘어 은암 선생 댁(경성제국대학을 다니셨고 한학과 다른 학문이 매우 깊으셨으나 좌익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신 뒤라 집에서 누워계셨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 돌아가신 걸로 기억한다.)에 심부름을 해도 되겠다.(집에서 족히 시오리 길은 넘는 길이었다.) 단오가 다가와 부채를 만들었으니 전해드리고 오너라. 가서 절하고 곧장 돌아오너라.”


나는 말없이 선친께서 주신 부채 함을 들고 시오리 길을 걸어서 전해드리고 왔다. 그 해부터 선친이 부채를 만들지 못하시던 해까지 매년 단오 부채를 누군가에게 전해 드리는 역할을 맡았다. (30개 정도를 매년 돌리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어린 나의 생각으로는 집에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선친이 기동도 못하시면서도 먹을 갈게 하고, 그 구불구불한 扇面에 글을 쓰시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며 못내 불만이었던 기억이 난다.


선친은 나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너는 글씨 쓰는 재주도 그림 그리는 재주도 없으니 함부로 붓을 잡지 마라!”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니 아예 가까이하지 말아라!”


하여 나는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글씨를 배운 적은 더더욱 없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우연하게 담임선생님께서 따라오라 하여 무슨 그림 대회에 갔다. 물감도 크레용도 없으니 먹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해서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확하게 몇 등인지는 모르나 상장을 받아 집에 가져갔더니 선친은 칭찬은 고사하고 일거에 그 상장을 찢으시면서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신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정말 이런 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30대 후반에 근무하는 학교에서 뭔가를 크게 써서 걸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오로지 큰 붓으로 쓰는 방법밖에 없던 시절이라(학교가 면 지역에 있어 간판을 하는 곳조차 없었다.) 젊은 내가 우연히 붓을 잡고 써 보았더니 모두들 배웠냐고 물어보았고 그 후로 그런 종류의 일은 모두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선친의 가르침이 옳았다. 몸이 피곤해지는 일이었다.


40대가 되면서 단오가 되면 하릴없이 스스로를 위해 부채를 만들었다. 간혹 아내에게만 하나 더 만들어주기도 했다. 학교에 가서 부채를 사용하니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도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40대 중반부터 하나 둘, 다른 이에게 부채를 그려주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친의 그 일이 세월이 흐른 뒤 나의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나의 글씨와 그림으로 말하자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글씨를 정통으로 배운 적도 없고, 그림은 더더욱 배운 적이 없다. 모두 사이비다. 스승이 없으니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몇 해 전 공무원 휘호대회에 출품했더니 스승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없다고 했더니 입선이란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내가 밥 벌어먹는 수단도 아니니 내가 쓰고 그려 타인에게 주면 그걸로 충분하고 아름다운 일 아닌가?


선친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글씨도 그림도 완전히 못 볼 정도는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흉내를 낼 뿐이지만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 그뿐이다.


40년 전 선친이 그린 부채는 고결하고 우아하며 장엄했는데, 안타깝게도 단 한 점의 부채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쉽고 부끄럽다. 선친의 불행한 과거와 나의 불찰이 그저 안타까운 2018년 단오 앞 날, 올해 부채를 쓰고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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