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자의 깨달음
사진기가 없던 시절 가족이 한 곳에 모여 포즈를 취하고 그린 사진 같은 일가족의 그림이다. 검은 옷을 입고 서서 딸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여자는 화가의 고모인 Laura Bellelli(라우라 벨리니)이고 서 있는 소녀는 그녀의 큰 딸인 Giovanna(지오반나)이며 언니보다는 좀 더 활발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작은 딸은 Giulia(지울리아)이다. 가족과 좀 떨어진 곳에서 뭔가 일을 하 던 중 그림 속에 뒷모습만 보여주는 남자가 바로 로라의 남편이자 두 딸의 아버지인 Gennaro Bellelli(제나로 벨리니) 남작이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Hilaire-Germain-Edgar De Gas(일레르 제르맹 애드가 드가, 1834~1917)인데 이 그림을 시작할 1858년 당시 그는 이탈리아의 고모(Laura Bellelli) 집에 초청을 받고 로라 고모가 사는 플로렌스(피렌체)에 머물면서 이 그림을 시작했는데,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 가지 버전의 그림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859년 파리로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작업들로 바쁜 탓에 이 그림을 완성하였는지 혹은 완성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그림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처음 이 그림을 시작한 지 9년 뒤인 1867년 파리 살롱에서였다.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그림이지만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엄숙하고 경직된 모습이다. 특히 서 있는 드가의 고모는 시선을 멀리 고정한 채 어두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 이유는 검은 상복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뒤로 보이는 작은 액자에 걸린 그녀의 아버지(드가의 할아버지 Hilaire Degas)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고, 남편과의 성격차이로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던 탓도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로라의 시선은 남편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동시에 남편인 벨리니 남작도 책상 위에 서류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내인 로라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딱히 친밀하지 않은 둘 사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벨리니 남작은 이 그림을 그리는 드가와도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가족 전체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에서 화가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태도는 화가가 못마땅하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못마땅함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시선을 마주친 사람은 큰 딸 지오반나뿐이다.
드가는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두 조카의 독립적인 초상화와 두 조카가 동시에 등장하는 그림도 같이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 우리는 그 그림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 그림에서 서 있는 두 명의 조카 지오반나와 지울리아의 포즈와 벨리니 남작의 앞에 걸려 있는 거울의 반사 등은 드가 스스로 스페인의 Diego Velázquez(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그린 ‘Las Meninas(시녀들)’의 극적인 요소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정나라의 용한 무당인 계함(季咸)에게 미혹된 열자(列子)와 그의 스승인 호자(壺子)의 대응은 도가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즉 열자가 계함에게 스승인 호자의 상황을 점쳐보라고 이야기하고 세 번 점을 쳤으나, 계함은 열자의 스승 호자를 세 번 모두 다른 점괘를 내놓는다. 결국 계함은 자신의 점괘가 거짓임이 들통나자 도망을 가버린다. 이에 열자는 그의 스승 호자에게 이와 같이 된 이유를 묻고 크게 깨닫게 된다.
자신이 수행을 통하여 얻은 것을 진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진짜라고 말하는 것을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열자의 태도)을 지금의 우리 역시 겪고 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정보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따져보면 당시 열자가 겪은 일이 그가 아둔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자는 열자의 스승인 호자의 입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진실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즉, 눈에 보이는 변화와 눈에 보이는 사실에만 휘둘리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매진할 것을 장자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 뒤 열자는 자신의 얕은 배움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서 두문불출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미혹되어 스승을 시험해보려 했으니 참담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는 한 동안 넋을 놓고 지내다가 스스로 도를 깨우치는 단계로 나아간다. 즉, 그는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먹이면서’점차 자신을 다스린다. 그 결과 그가 도를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다 일생을 마친다.
그가 이렇듯 일상에서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계함이라는 세상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을 스승, 호자의 경지로 해서 큰 가르침을 받고 일상의 노력을 통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열자의 이야기는 장자가 우리에게 하려는 말, 어느 것에도 구속(계함의 점괘)됨이 없이 자유로워야 함(호자의 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