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by 김준식

백겁적집죄


겁은 산스크리트어 ‘kalpa’의 음역인 劫波(겁파)의 약칭으로, 長時 혹은 大時로 의역된다. 불교에서 시간 개념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뜻하는데,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이란 뜻으로 쓰인다.


동시에 매우 길고 오랜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1 칼파는 본래 인도에서는 梵天(범천)의 하루, 곧 인간계의 43억 2000만 년으로 산정한다. 梵天(범천, 브라흐마)은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창조의 신으로 비쉬누, 시바와 함께 힌두교의 삼 주신을 이룬다. 브라흐마는 힌두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적 원리이자 최고 원리인 우주적 정신, 또는 존재인 브라만이 인격화 된 남신이다. 브라흐마의 배우자는 배움의 여신인 사라스바티이다. 브라흐마는 베다(리그베다, 야주르베다)에서 프라자바티라 불리기도 한다. 신화나 그림 속에서 브라흐마는 네 개의 머리와 팔, 두 개의 다리, 수염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즈음 더위는 단 몇 분도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진다.



일념돈탕제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지는 시간은 과연 끝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더위에 시달리면서 이런저런 잡념에 사로잡힌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처의 이야기를 매우 사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동시에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간의 비유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부처의 말씀 중에서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설명이나 비유가 덜한 부분이 바로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주 물었으나 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하셨는데 어느 날 蔓童子(만동자, 말룽꺄뿟타, Malunkyaputta)라는 비구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요? 또는 무상한가요? 끝이 있는가요? 또는 없는가요?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요? 둘 인가요?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요? 또는 존재하지 않는가요? [중아함 권 60. 전유경(箭喩經)]”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 인도의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미약하거나 또는 생략되어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는 만일 부처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지 않는다면 부처님 곁을 떠나겠다는 단호한 태도까지 보였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독화살을 맞은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일반 나무로 되었는지 대나무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화살 깃이 매 털로 되었는지 닭의 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그러면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이 사람처럼 독화살을 맞은 뒤 이렇게 지체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문제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인간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이와 같이 빨라서, 한가로이 이것저것 따지는 일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쓸데없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의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인생의 보다 중요한 문제는 현실적인 고통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응해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펴는 부처님의 목적은 바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논리에 빠져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현실의 여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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